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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감옥에 갇힌 트랜스젠더 "여자가 되고 싶다"






“밖에서 누가 뭐라 하건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여자가 됐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해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렌스젠더 죄수 첼시 매닝(27ㆍ옛 이름 브래들리 매닝)이 감옥에서 전해 온 말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정보분석병으로 근무하던 2010년 전쟁 관련 영상과 미국 국무부의 외교 전문 등 기밀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넘겨 폭로한 혐의로 2013년 35년형을 선고 받았다.


선고 후 그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 나를 알아줬으면 한다. 나는 (브래들리 매닝이 아니라) 첼시 매닝이다. 나는 여자다”라고 선언하며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 치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더 큰 화제를 모았다. 현재 미 캔자스주 포트리벤워스 군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그에 대해 미 국방부는 올해 초 호르몬 치료를 허용했다.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 치료가 허용된 후 처음으로 매닝이 미 언론에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패션지 코스모폴리탄 인터뷰에서 여자로 남자 교도소에서 지내는 경험과 여자로 살고 싶은 평생의 욕망에 대해 털어놨다. 매닝의 인터뷰는 최근 발간된 잡지 5월호에 실렸다. 군 당국이 전화나 직접 면회를 금지했지 때문에 인터뷰는 수 차례에 걸친 편지를 통해 진행됐다.

매닝은 미 오클라호마 크레센트에서 태어났다. 인구 1300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주민 수보다 교회의 의자 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로 보수적인 기독교 동네다.

“언니의 방을 동경했어요.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그녀의 화장품을 바르면서 행복해 했죠. 그곳은 마치 나에겐 오아시스 같았어요.”

매닝은 5~6살 때 언니의 방에서 비밀리에 여자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남들에게 그걸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누군가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에 떨었을 뿐”이라며 “너무 외로웠다”고 말했다. 매닝은 당시엔 “내가 게이가 될 수 있거나 성전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며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 그저 사춘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주입시켰다”고 말했다.

매닝의 부모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별거 생활을 했다. 2001년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하면서 부모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매닝은 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영국 웨일즈 하버포트웨스트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역시 왕따를 당했다.

200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오클라호마 돌아온 그는 한 소프트웨어 회사의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 취향을 알고 난 뒤 그를 집에서 쫓아냈다. 매닝은 200km 떨어진 곳의 친구 집에 기거하며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2006년에는 낡은 화물차를 타고 미국 횡단 여행을 하기도 했다. 차에서 먹고 자면서 노숙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 시카고의 이모 집에 정착했다. 매닝은 “너무 바쁘고 (성전환) 치료에는 돈이 많이 들 거라는 걱정에 여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2007년 여름 매닝은 입대를 결심했다. 그는 “마초적인 환경에서라면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군 생활이 쉽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현실은 더 혹독했다. 특히 인간 관계가 그를 괴롭혔다. 매닝은 “개인 물품 목록을 작성하던 상사 한 명이 내 전화기가 분홍색이라고 공개적으로 놀려댔다”며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늦은 밤 몰래 학대를 당하는 날도 셀 수 없이 이어졌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매닝은 군대 정보 분석가가 됐다. 이라크 파병 준비를 하면서 대학에 다닐 땐 사랑에 빠졌다. 매닝은 “그에게 처음으로 ‘여자가 되고 싶다’고 털어놨다”고 말했다.

이라크 파병 생활 중 어렴풋하던 생각이 점차 확실해 졌다. 매닝은 “매일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보고서를 다루면서 삶이 얼마나 짧고 소중한지, 나 역시 한 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야 하지 않나 하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매닝은 그러나 인터뷰에서 기밀 문서 폭로와 관련한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 그는 재판에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검찰은 그러나 매닝을 배신자로 낙인 찍었다. “미군을 위험에 몰아 넣고 국가 안보를 헤칠 수 있는, 기밀 문서를 폭로한 인물”로 취급했다. 매닝에 대해서 ‘정부 정보 편취’를 포함해 20개 항목에 대한 유죄가 선고됐다. 매닝이 법정에서 유일하게 이긴 소송은 ‘매닝을 언급할 때엔 여성 명사나 성 중립적 단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공식 문서에 ‘He’가 아니라 ‘She’로 써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또한 줄리안 어산지 전 위키리크스 편집장에 대한 언급도 피했다. 어산지는 현재 런던의 에콰도르 대사관에 망명 중이다.
매닝은 3년째 복역 중이다. 소송 끝에 미 국방부는 매닝에게 몇 가지를 허용했다. 성전환 호르몬 치료, 화장, 여성 속옷 착용 등. 그러나 긴 머리는 금지했다. 매닝은 “남자 감옥에 수감된 여자 죄수이지만 다행히 성추행을 당한 적 없다”고 말했다.

매닝은 전세계 트렌스젠더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지만 내가 오히려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말했다. 최근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 미 국가안보국(NSA) 비밀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 등으로부터 생일 축하 카드를 받았다.
인터뷰 말미 매닝은 “커밍아웃을 좀 더 빨리 했더라면 내 인생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라며 “나를 둘러싼 세계를 겁내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더라면 더 많은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라고 자문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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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