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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4·19의 유산, 국가전략 선택의 지표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나라 안팎의 정세가 어지럽고 엄중하기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기본자세를 다시 가다듬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한국사에서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구체화하는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4·19민주혁명 55주년을 맞는 우리의 심경이다.

 나라를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겼던 암울한 시기에 민주공화국 건립으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독립운동이나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 건국사업을 주도했던 것은 수많은 선각자, 선구자, 지도자였다. 그러나 국민이 함께 약정한 헌법 질서에서 정치가 이탈하고 사회 정의에 대한 기초적 규범이 무시되는 위기에서 분연히 궐기한 것은 누구보다도 해방 후에 초등교육을 받은 한글세대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은 우리의 사회공동체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정신을 지켜가고자 젊은 학생들이 기수가 된 4·19는 국민국가와 시민공동체의 가능성을 행동으로 선포한 역사적 시발점이었다.

 4·19가 곧바로 민주화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오랜 권위주의 시기에도 4·19의 민주정신은 국민의 혈관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층에서 계속 불타고 있었다. 그 불꽃은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력을 유지하며 마침내는 6월항쟁을 통한 민주화와 87년체제의 출범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의 의사가 충실히 반영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제도화와 국가운영의 보다 높은 능률화를 어떻게 실현하느냐는 숙제는 여전히 우리 국민을 짓누르고 있다. 4·19의 시민정신과 공정한 사회를 갈망하는 오늘의 국민적 지혜를 융합해 시민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 과감히 도전해야 할 시점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국내정치 혼란에 못지않게 국제정치도 강대국 간의 새로운 균형을 모색하는 위태로운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 열강의 지정학적 국가전략으로의 회귀는 ‘제국의 향수’라는 위험한 증세가 강대국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중국·일본이 그러한 추세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과 결단을 예고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여준 강수는 제정러시아와 소비에트연방이 누렸던 제국의 영광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향수에 의존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국력을 토대로 오랜 중화의 역사와 제국의 영광을 새로운 초강대국의 모습으로 재현하려는 꿈을 안고 있다. 한편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와 서양화에 성공했던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의 영광에 대한 집착과 수많은 희생자와 파탄을 가져온 군국주의화에 대한 반성 사이에서 갈 길을 망설이고 있다. 이렇듯 강대국들을 사로잡은 제국의 향수는 우크라이나 사태나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의 영토 및 영해 분쟁과 더불어 군사적 대치 상태가 계속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드는 불길한 징조가 되고 있다.

 분단 70년을 맞는 한반도는 군사와 경제의 세계 1, 2, 3위 강대국인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의 영향력이 각축을 벌일 수 있는 교차점에 놓여 있다. 그 가운데서 추진되는 한국의 외교전략은 세력균형의 추이에 따라 요동치며 좌고우면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에 기민하면서도 유연성 있게 대처한다는 것은 성공적 외교전략의 기본이다. 다만 그러한 유연성은 우리가 지켜가겠다는 국가의 기본가치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뒷받침될 때만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기본가치는 무엇인가. 바로 55년 전 4·19혁명에서 확인된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민주공동체를 지켜가는 것이며 이에 국가전략의 최우선 순위를 둔다는 것이다.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러시아·중국·일본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국가의 모델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서 작은 나라 한국이 민주국가로 버텨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내셔널리즘보다는 인터내셔널리즘의 기수가 되겠다는 적극적 외교전략을 추진하려면 응분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처럼 외롭고 힘든 국가전략을 선택하는 용기와 자존심은 지난 백 년 우리가 겪어온 시련으로부터 터득한 국가 생존의 지혜가 우리의 국민적 저력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지구촌 시민들은 민주정치와 사회정의의 꿈을 고집하는 한국인의 횃불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50돌을 맞은 4·19혁명의 유산은 우리의 앞길에 지표임에 틀림없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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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