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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잠든 아이들에게

선연(善緣)이라고 할까. 나는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다. 첫 영화, 첫 신은 물론 내 인생의 첫 대사까지, 모두 1976년 서울에서 촬영했다.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찍은 ‘사랑의 스잔나’는 내게 그만큼 특별한 영화였다. 그러니 추억이 많을 수밖에.

2004년 친구가 한국 팬 한 분이 나를 위한 인터넷 팬클럽을 만들었다고 알려준 적이 있다. 그 팬은 내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2002년부터 팬클럽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 팬의 바람은 내 답장을 받는 것이라고 친구가 전했다. 친구는 당장 답장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나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친구는 펜과 종이를 들고 와 말로 하면 대신 적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펜을 잡지 않자 친구는 냉정하고 무정하다며 비난했다.

그때 이미 세 아이의 엄마였지만 지금만큼 성숙하진 못했던 것 같다. 팬들과 직접 소통하면, 내 모습이나 목소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성대 수술 역시 두려움에 한 몫 했다. 어떻게 팬들에게 ‘당신의 우상이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알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듬해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신문에서 한국 청년이 (중동에서) 괴한에게 피습 당했다는 뉴스를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치 친한 지인이 나쁜 일을 당한 것처럼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나는 승무원에게 펜과 종이를 부탁했다. 그리곤 한국 팬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그 후로 우리는 친구처럼 편지를 끊임없이 주고받고 있다.

지난해 4월 16일엔 제주도로 가는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마치 10년 전 그 비행기에서처럼. 300명이 넘는 삶이 허무하게 끝났다. 어떤 말로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는 없을 터다. 당장 펜을 들고 슬픔을 당한 유가족과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로를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인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조용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수밖에.

그해 5월 제주도를 처음 찾았다. 첫 인상은 매우 평온하고 편안했다. 농작물이 도처에 널려 있고, 다원의 차향은 은은하게 퍼졌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엔 문인의 정취가 넘쳐 흘렀다. 해안을 지날 때 가이드에게 좀 더 머물렀다 가자고 부탁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바닷 속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슬픔이 차올랐다. 눈 앞의 광경을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길가에서 갖고 있던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서 되레 고독을 느꼈다. 글을 통해 슬픔을 당한 이들을 애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시와 그림 ‘제주로 돌아오라’(사진)는 말레이시아로 돌아온 뒤 제주도에서의 초고를 고쳐 완성한 것이다. 먹색만 사용했을 뿐 다른 색은 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낙심한 감정이 보다 두드러지게 배어난다. 한 번도 정식으로 시를 써 본 적은 없지만 그때만큼은 참혹한 사고를 당한 고인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었다. 내 첫 시를 그들에게 바친다. 이 작품을 자선 바자에 내놓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비매품으로 남기기로 했다. 생명은 오직 한 번 뿐이고, 감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깊게 잠든 아이들아/ 바람은 이미 잠잠해졌다/ 다시는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즐겁게 웃던 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가 파도로 변해 해안을 때린다/ 혼이라도 돌아오려무나.’



천추샤 홍콩 출신 가수이자 배우. 팝송 ‘원 서머 나이트’와 영화 ‘사랑의 스잔나(원제 추하·秋霞·1976)’의 주인공. 1975년 데뷔한 뒤 81년 말레이시아 화교 기업가와 결혼하면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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