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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압도하는 소리와 빛과 인간 내면 꿰뚫는 18명의 나신

침침한 조명 아래 네 박자 북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진다. 한 여자가 검은 실커튼을 헤치고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정확히 열두 걸음 걷다가 두 박자 만에 바로 뒤로 돌아 다시 열두 걸음을 걷는다. 이번엔 한 남자가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어 두 여자, 세 남자 급기야 무표정한 남녀 18명이 따로 또 같이 등장해 40분간 오롯이 걷기만 한다.

실커튼과 걷는 동작. 이 두 가지 키워드는 전혀 파격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마기 마랭 안무 ‘박수만으론 살 수 없어’에서 실커튼을 배경으로 한, 등퇴장의 묘미를 즐긴 바 있다. 30여 년 전 앤디 드구로가 ‘백조의 호수’에서 록음악에 맞춘 걷는 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 걷는 동작만으로 안무한 예는 더더욱 흔하게 봐왔다. 그런데 이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18명의 무용수가 전라(全裸)로 등장해 무대를 누비며 객석을 압도했다.

올리비에 뒤부아(43)가 안무한 ‘트레지디(Trag<00E9>die)-비극’이 입성했다(4월 10~11일 성남아트센터). 2012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작으로 첫 선을 보인 후 세계 40여 개 도시를 거쳐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찾아왔다. 초연 이후 줄곧 ‘안무상의 탁월함’이라든가 ‘무용수의 뛰어난 기량’보다 ‘누드’라는 수식어가 먼저 언급되었기에, 몇 해 전부터 국내 무용계에서 ‘19금(禁)’을 내건 해외작품이 넘쳐났기에, 솔직히 이미지 컷이나 동영상을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40분간 걷기만 하던 무용수들이 시한폭탄처럼 일순간 폭발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서서히 비틀거리며 걷는 동작의 변형(變形)을 만들더니 배경음의 변조(變調)와 함께 모두 바닥에 쓰러져 하나의 육체로 합쳐졌다. 이 또한 사샤 발츠의 ‘육체’가 떠오르는 대목이었으나 역시 전라가 주는 힘은 강렬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젠 본능과 맞섰다. 남녀 그룹으로 나누어 광란을 쏟아내더니 애욕(愛慾)을 묘사한 동작을 반복했다.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 속에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까지 가세해 펼쳐지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고통을 드러냈다. 파괴적인 강한 힘의 고통이 객석까지 전달되면서 ‘비극’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뒤부아는 안무가가 되기 이전 ‘뚱뚱한 무용수’로 이름을 알렸다. 늦은 나이(23세)에 시작한 무용, 본인이 좋아서 하는데 신체적인 조건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몰라도 그는 작고(170cm) 뚱뚱했다(80kg). (지금도 그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긴 팔과 다리,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무용수들 틈에서 그는 영락없는 미운오리새끼였다.

하지만 발레를 비롯해 온갖 장르의 춤을 섭렵하면서 탁월한 소질을 보였고 개성미를 찾고 있던 거장 얀 파브르, 앙즐랭 프렐조카주의 눈에 들어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컨템퍼러리댄스의 트렌드 덕이라고 본인도 인정했듯 이 시대가 그를 무용수로 받아들인 것이다.

무용의 신 니진스키의 ‘목신의 오후’를 춤춰 조롱과 야유를 받기도 했지만, 신체에 대한 그의 각별한 정의는 안무를 시작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안무작 ‘지상의 모든 금을 위하여’에서 “정형화된(우리가 날씬하다고 판단하는) 육체로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는 자신만의 육체 미학을 강조한 바 있다. 이번 ‘비극’에서 여러 체형의 무용수를 전라로 무대에 세운 것도 이런 생각의 결과라고 본다.

관능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싸운 흔적이 역력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모티브를 얻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군무를 짰다. ‘퍼레이드’ ‘에피소드’ ‘카타르시스’로 세 단계를 명확히 나누고, 알렉산드리아의 12음절에 따라 12걸음을 걷게 했다. 시놉시스와 동작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틀 안에서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 위한 유일한 창구로 누드를 선택했다. ‘왜 벗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일 게다. ‘왜 비극이냐’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파괴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곧 비극이다”라고.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18세기 초 ‘피그말리온’에서 마리 살레가 얇은 천의 속옷만 입고 춤춘 것을 누드 무용의 시초라고 본다면 이사도라 덩컨, 루돌프 라반을 거치면서 자연주의 철학과 함께 춤은 줄곧 누드로 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평화주의, 여성해방주의가 다시금 옷을 벗게 만들었듯, 무용사에 새로운 사조가 등장할 때마다 누드는 늘 도화선이 됐다. 그리고 뒤부아가 이번에 방점을 찍었다. 외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꼭 벗어야만 하는 이유를 강하게 어필했을 때, 우리는 말초적 쾌락을 넘어 육체의 아름다움을 탐미하게 된다.


글 장인주 무용평론가 cestinjoo@daum.net, 사진 성남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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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