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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내 가슴에 묻은 4월

언제부터인가 나도 어머니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살아계실 때 어머니는 “올라?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여기 왔지?” 부엌에서 음식을 하다 안방으로 건너와 서성거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정표도 없이 휭~ 하니 신작로의 먼지처럼. 남자는 눈물 없는 동물이라 했나. 어머니 생각에 슬픈 땐 그저 먼 하늘이 나의 친구였다. 70년대 후반 집안 형님들은 이민을 떠나는 등 다 흩어졌다. 나만 원불교 교무로 출가해 마을을 지키는 늙은 팽나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정확히 한 달 열흘 동안 암 투병을 하다 이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께서 떠나기 전 당부한 얘기는 “막둥아! 나 죽으면 너 어찌 살래”였다. 그때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당시 병실 벽에는 커다란 백두산 천지가 내려 보이는 맑은 기슭에 꽃이 활짝 피어있는 풍경사진을 붙여 놓았다. 날마다 이 사진을 바라보며 희망을 갖고 좋아하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 날 정산종사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법문을 하셨다. “항상 마음에 사가 없어야 하고 또 청정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도 깨끗해지고 업장도 사라진다.” 죽음도 ‘삶의 한 자락’. 또 “삶이 청정했으면 저 만큼의 저승길도 또한 청정하리라.” 스승님 말씀처럼 하루하루 오염되지 않는 영혼으로 풋풋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누나는 “동생! 자네는 어찌 그리 싸가지가 없냐. 엄마 돌아가시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다니”라며 섭섭해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난 어떤 상황이 닥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를 볼 때는 가끔 주체 못할 정도로 손수건을 찾을 때가 있다. 나의 이중성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사는 것은 자기만의 여행이고 아득한 길이다.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라 해도 그곳에는 아침 이슬에 젖은 포플러 나무의 산뜻함이 있고, 아스팔트 곧은 길을 가더라도 단조로움과 권태가 함께한다.

주변에 책임을 맡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가끔 본다. 그때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 대신 저 골치 아픈 책임을 맡았으니 무조건 감사할 뿐이다.”

수도인의 의자는 다 썩은 나무의자나 진배없고, 벼슬이라고 해야 닭 벼슬에 불과해 항상 경계할 일이 그런 일이다.

지난주 허공하고 맞닿을 한라산 오름에 올랐다. 산언덕은 푸근한 어머니의 가슴을 닮았지만 돌무덤 주변에 핀 수선화 몇 송이는 바람에 흔들렸고 초록 꽃대는 마음을 열게 했다. 아름다운 꽃은 그만큼 감성을 새롭게 살아나게 한다.

당나라 시인 우무릉(于武陵)은 “꽃이 필 때는 비바람이 많고 인생이 풍족해지면 주변사람과 이별도 겪게 된다(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 했다.

유명해지고 권세가 있을수록 가깝던 사람이 멀어져 스스로 외로워진다는 말이다.

얼마 전 수채화를 그리며 깨달은 게 있다. 연필 스케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미적인 조화’와 ‘내용의 정밀함’, ‘색감의 로맨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 삶도 때로 ‘스케치가 잘 안 된 그림’은 아닐까.

20년 전 어머니는 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며 “몸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다시 못 들어올 수 있으니 신발이나 가지런히 놓고 가자”고 했다. 어머니가 결국 집에 돌어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게 되었던 그해, 묘지 근처에 흩날리던 산벗나무 꽃잎처럼 내 가슴을 적신 적막함이 4월을 간직하고 있다.



정은광 원광대 박물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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