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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2>"린뱌오가 국가주석 노린다"고 판단한 마오쩌둥

중국홍군의 아버지 주더(오른쪽)와 함께 만찬에 참석한 린뱌오. 1968년 인민대회당.


1949년 9월 21일부터 열흘 간,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회의 첫 날, 중공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중앙 인민정부 주석에 선출했다. 10월 1일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자격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59년 4월, 마오쩌둥은 “모든 정력을 중요한 문제에만 집중시키겠다”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에 사직원을 제출했다.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마오의 뒤를 이었다. 문혁이 발발하자 류사오치는 타도 대상으로 전락했다. 1969년 가을, 약 한 첩 제대로 못 쓰고 세상을 떠났다. 국가주석은 공석이 됐다.

보기 싫은 것들을 없애버린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제도가 못마땅했다. “있으나 마나 한 쓸 데 없는 자리, 없느니만 못하다.” 70년 3월 8일, 마오는 헌법 개정과 국가체제 개혁, 국가주석 폐지에 관한 의견을 중앙정치국에 전달했다.

마오의 건의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9일 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주재 하에 중앙 공작회의가 열렸다. 헌법 개정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만장일치로 마오의 건의를 통과시켰다. 이때 린뱌오(林彪·임표)는 수저우(蘇州)에 있었다. 마오에게 의견을 전했다. “마오 주석이 국가주석에 취임하기를 바란다.” 중앙 정치국은 토론회를 열었다. 다들 린뱌오의 의견에 동의했다.

마오쩌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가주석은 형식이다. 허직(虛職)은 없는 게 낫다.” 이어서 특유의 어투를 구사했다. “삼국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손권(孫權)은 조조(曹操)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했다. 속셈이 따로 있었다. 조조를 화로 위에 올려놓고 구울 심산이었다. 너희들에게 권한다. 나를 조조로 만들지 마라. 너희들도 손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충돌 초기의 마오쩌둥과 린뱌오. 표정들이 심상치 않다.


린뱌오는 완강했다. 우파셴(吳法憲·오법헌)과 만난 자리에서 짜증까지 냈다. “명분이 분명해야 국민이 순종한다. 무슨 조직이건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국가에는 국가주석이 있어야 한다. 리쭤펑(李作鵬·이작붕)과 함께 개헌 논의 소조에 참여해라.”

정치국은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캉셩(康生·강생), 우파셴,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 리쭤펑 등이 머리를 맞댔다. 헌법이라는 게 있는 줄은 알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보니 불평이 많았다. 우파셴이 특히 심했다. “헌법인지 뭔지, 이런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규정만 따르다 보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끼리 의논해서 결정하면 된다. 그래도, 국가주석은 꼭 있어야 한다.”

예췬(葉群·엽군)은 린뱌오의 추종자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천보다(陳伯達·진백달)에게 속내를 드러냈다. “국가주석을 선출한다면, 남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마오 주석은 한번 갔던 길은 다시 안가는 사람이다. 사직을 자청했던 국가주석에 복직할 리가 없다. 부주석이 나서서 마오쩌둥을 국가주석에 추대하면 다들 찬성하겠지만 마오는 사양할 것이 분명하다. 국가주석은 자연스럽게 린뱌오 몫이 된다.”

예췬의 추측은 근거가 있었다. 1년 전, 중공 제 9차 대표자대회 첫번 째 회의에서 린뱌오가 주석단 주석을 권했을 때 마오는 “나보다 린뱌오 동지가 적합하다”며 사양한 적이 있었다.

담벼락에도 눈이 있는 시절이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국가주석 직을 탐낸다고 판단했다. 중공 9차대회 두 번째 회의를 소집했다. “헌법 수정과 경제계획, 전쟁준비 강화 등을 토론하자.” 회의 장소는 알리지 않았다. 다들 베이징이겠거니 했다.

텐안먼 성루의 린뱌오와 천보다. 1967년 봄.


문혁 시절 상하이시 서기를 역임한 쉬징셴(徐景賢·서경현)은 92년 봄, 홍콩의 한 월간지에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70년 초여름, 운무(雲霧)에 휩싸인 장시(江西)성 뤼산(廬山)에 봉쇄령이 내렸다. 노련한 정원사와 건물 수리공들이 줄지어 산으로 올라갔다. 성 간부들은 난창(南昌)과 지우장(九江)의 요리사와 운전기사, 요식업소 접대원들을 직접 심사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선발해 뤼산으로 보냈다. 규율이 엄격했다. 서신 왕래나 전화는 물론이고 자신이 와 있는 장소를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받았다. 뤼산에는 거류민들이 많았다.

가장 번화한 지역인 중국 과학원과 식물원 인근에는 특히 많았다. 뤼산 범위 내에 있는 수 천명의 거주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적합 판정을 못 받은 사람들은 산에서 쫓겨났다. 절이나 도교사원에 남아 있던 승려와 도사들도 산에서 내려가라는 명령에 따랐다. 산이 텅 비자 무장군인들이 산을 에워쌌다.

지우장 비행장에는 온종일 뜨고 내리는 군용기 소리가 요란했다. 도처에 레이다 기지와 헬기 이착륙장이 설치됐다. 수목 사이사이에 무장군인들의 눈이 번득거렸다. 문혁 시절이었지만, 인간세상은 어쩔 수 없었다. 혁명이다 뭐다, 중국 천지가 요동을 쳤지만 놀러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유람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멍한 기색이었다. 멀리 있는 봉우리들 바라보며, 감탄만하다 발길을 돌렸다. 천하의 명산에서 마오쩌둥과 린뱌오가 격돌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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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