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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樂] 어둠과 슬픔 뒤에 부활의 희망을 품고싶은 마음

베를린필이 2013년 공연한 `마태수난곡`에서 복음사가로 열연중인 마크 패드모어(앞).


다시 4월이다. 마치 1년상을 치루고 있는 듯하다. 땅 위의 시간이 공회전하는 동안 진실은 차가운 바다 속에 여전히 잠겨 있다. 아홉명의 실종자들은 아직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한 비탄과 슬픔은 살아남은 모든 이에게 현재형이다. 진실을 인양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이 슬픔도 그칠 것을 알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도 마음은 여전히 이렇듯 무겁다.

며칠 째 작은 위로라도 받을 요량으로 CD장이며 LP장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어느 것 하나 흔쾌히 손이 가지 않는다. 슬픔을 짜내기 위한 애도용 진혼곡이나 비장한 음악을 찾는 건 아닌지 스스로 의심이 들어 몇 번을 멈추었다. 무심히 흘러나오는 FM라디오 소리로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수난곡 BWV244’이 생각났다. 종종 무인도에 들고 갈 음악을 추천하라고 하면 첫 손에 꼽던 곡이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멀리 돌아 생각이 난 셈이다. 바흐라는 위대함과 경건함에 어수선한 마음을 잠시 의탁하고 싶다. 물론 나는 신을 믿지는 않는다. 모양새 좋게 이야기하면 유물론자와 범신론자 중간쯤에 있는 것 같다. 비록 신을 믿지는 않지만 많은 음악팬처럼 바흐는 믿는다.

바흐 사후 멘델스존에 의해 세상 빛을 본 ‘마태수난곡’은 그의 음악 중에서도 으뜸이다. 아름다운 아리아와 다성 합창들, 그리고 섬세하게 써내려간 레치타티보, 텍스트의 드라마틱한 요소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마태수난곡’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26,27장의 최후의 만찬부터 유다의 배반, 재판,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중심 내용으로 한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사이먼 래틀이 2010년 실황으로 공연한 베를린필과 베를린방송합창단의 마태수난곡.


평소보다 숙연한 마음으로 들은 ‘마태수난곡’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2013년 공연실황이다. 베를린필이 자체 개발하여 스트림서비스하고 있는 영상물이다. 지휘는 사이먼 래틀이고 파격적인 스타일의 무대로 유명한 피터 셀러스가 연출을 맡았다. 독창진들도 당대 최강이다. 마크 패드모어, 크리스티안 게르하허, 막달레나 코체나, 카밀라 틸링 등등. 슈퍼 히어로들의 연합체 같은 이 조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피터 셀러스와 마크 패드모어다.

연출가 피터 셀러스는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도 오케스트라 무대를 2000년 전 유대 땅으로 이끌어 가는 마법을 선보인다. 오케스트라를 사이에 두고 합창단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오케스트라 사이사이를 거닐며 노래하고 비탄에 잠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합창단원들은 자신의 파트가 아닐 때조차 끊임없이 연기한다.

때로는 비탄에 젖은 제자들이 되기도 하고 성난 군중이 되기도 한다. 또는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이 되기도 한다. 합창단의 탄탄한 실력만큼이나 이들이 보여주는 연기의 자발성은 인상적이다. 극의 몰입도를 높이고 고통의 한 복판으로 관객을 이끌어 가는 힘이 탁월하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징적이고 단순한 무대 배치는 이 작품이 가진 역사성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모든 출연진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으며 무대 중앙에는 사각형의 오브제만이 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상이 되기도 하고 예수의 관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일체의 장식이 없는 미니멀한 무대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의 슬픔을 시대와 역사를 건너 보편적으로 공유하게끔 한다.

스위스출신의 테너 에르네스트 해플리거(1919~2007)
피터 셀러스와 사이먼 래틀의 조합에 화룡점정은 내레이터에 해당하는 복음사가 마크 패드모어이다. ‘마태수난곡’에서 이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누가 복음사가를 맡았느냐가 연주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마태수난곡’ 최고의 명연으로 알려진 칼 리히터의 1958년 녹음에서 에른스트 헤플리거가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복음사가로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베를린필의 공연실황에서 마크 패드모어는 역대 어떤 복음사가들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적 유약함과 실존의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즉 보호본능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다. 바흐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피터 셀러스에게 ‘마태수난곡’은 신을 예찬하기 위한 노래가 아닌 인간을 위무하는 노래인 셈이다.

그렇다보니 인간적인 복음사가 마크 패드모어의 비중이 늘어난다. 그는 모든 대사와 합창, 아리아에 반응하며 세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기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본연의 임무는 물론이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예수가 되기도 하고 슬픔을 응시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극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십자가 위의 예수 장면에서 그는 오로지 하나의 백열등 아래 신의 아들로서가 아닌 인간 예수의 비애를 탁월하게 연기한다.

세월호 1주기인 올해 봄, 바흐만이 위로를 준다. ‘마태수난곡’에서 유독 마음을 잡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예수 부활 이전에 끝난다는 사실이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계절에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흘 뒤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마태수난곡’ 마지막 코랄이 흐른다. “우리들은 눈물에 젖어 무릎 꿇고 당신을 부르나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지금의 슬픔과 어둠 뒤에 부활의 기적이 있기를. 그렇게 믿고 싶은 날들이다.

엄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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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