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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취리히 통신] 스위스 생활 4년 ‘알프스댁’의 결론 … 지상천국은 없더라

스위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독립적인 아이들’이다. 공교육이 시작되는 네 살부터 아이들은 유치원에 혼자 다닌다. 부모가 함께 가면 교사들이 ‘혼자 올 수 있도록 하라’며 경고(?)를 한다. [사진 김진경]
임신 5개월째, 보일 듯 말 듯 나온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내린 건 4년 전입니다. 생애 첫 스위스 방문이었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 태어날 아기가 있었고 독일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데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게 될지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한국은 이미 초여름이었지만 스위스는 우중충한 하늘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쌀쌀한 날씨였던 것도 첫인상이 딱히 상쾌하지만은 않았던 이유입니다.

 이후 저(와 남편)는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겪는다는 5단계 심리 상태를 거쳤습니다. 1단계 부정. 설마 여기서 계속 살진 않겠지, 남편 회사 본사가 미국에 있으니 미국으로 옮겨가거나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2단계 분노(이 과정이 가장 길었습니다). 왜 마트고 백화점이고 일요일엔 죄다 문을 닫는 거야! 햄치즈 샌드위치 하나가 20프랑(약 2만3000원)이라니 금가루라도 들었어? 모든 아파트에 기본 옵션으로 장착된 냉장고는 어쩜 이리 코딱지만 해. 김치는 어디에 넣지? 동네 소아과 의사들이 동시에 여름 휴가를 떠나버리면 아픈 애는 어쩌라고? 이런 선진국의 대학 진학률이 20% 이하라니 불쌍한 아이들! 3단계 타협. 냉장고가 작아서 자주 장을 봐야 하니 채소가 신선해서 좋은 점도 있군. 대학 진학률은 낮지만 직업교육이 훌륭하고 실업률은 전 세계에서 최하니 여기 살면 대학 안 가도 걱정할 일 없겠어. 4단계 우울. 나는 이제 스위스에 뼈를 묻고 사는 건가. 큰 걱정도 없지만 큰 즐거움도 없는 곳에서, 미친 듯이 분리수거를 하면서? 5단계 수용. 그래, 이왕 사는 거 잘살아보자. 독일어도 배우고, 스위스 토박이 친구도 많이 만들고. 발코니에다 깻잎이랑 쪽파도 한번 길러보지 뭐.

 5단계를 거친 뒤 올 1월, 독일어 집중(intensive) 코스에 등록해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학원으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에게 역시 아시안 여자들이 똑똑하다는 칭찬을 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위스를 제2의 고향 삼으려는데,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더군요. “우리, 한국에서 몇 년 살면 어떨까?” 몇 달 전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뷰했던 한국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우리 부부는 일주일간 온갖 제도와 숫자와 문화 차이를 놓고 밤샘 토론을 벌인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외국에서의 삶은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며칠에서 몇 주짜리 여행, 반 년짜리 어학연수, 혈혈단신 주재원, 그리고 아이 딸린 부모로서의 생활은 겹치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외국인 애 엄마로서의 제겐 관광객을 매료시키는 깨끗한 스위스 분수대보다도 버스 정류장이건 놀이터건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먼저 눈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년에 암 치료를 받으러 스위스에 왔다는 기사를 보면서는 치과 보험이 포함되지 않아 별도로 들어야 하는 값비싼 스위스 의료보험 체계를 떠올렸죠. 물론 좋은 점도 많습니다. 깨끗하고 안전한 거리, 그래서 만 4세만 되면 혼자 유치원을 통학할 만큼 독립적인 아이들. 누구나 한두 개의 외국어는 능숙하게 하면서도 ‘스위스 저먼’이라 불리는 독일어 사투리 격인 자신들만의 언어를 꿋꿋이 지키는 점 등은 감탄스럽습니다. 제 결론은 지상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미디어에 보도되는 ‘○○분야 세계 *위’식의 수치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인은 비교에 익숙해 그런 수치를 기반으로 다른 나라를 쉽게 얕잡아 보거나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 전 와인 코스에 등록해서 다녔는데요. 첫 시간에 강사가 그러더군요. “서로 다른 와인 잔을 두 개 놓고 한 모금씩 마십니다. 잠시 쉬었다가 첫 번째 와인을 다시 맛보세요. 아리송했던 맛이 손에 잡힐 듯 확실히 느껴질 테니까요. 스텝 백(step back)은 와인 시음의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에요.” 이제 전 외국인 남편과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갑니다, 스텝 백을 하러요. 그동안 한국 토박이의 고군분투 유럽 정착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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