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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미국 유학 … 길 가득 메운 자동차 '미국의 힘' 느껴 … 1년 만에 전투 복귀 … "남편과 죽겠다" JP 찾아온 전선의 신부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 유학 시절의 김종필 전 총리(위 줄 가운데). 훈련 중 휴식 시간에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1차 도미유학 장교단에 선발돼 1951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전술학과 화기학 등을 배우고, 전투기와 전차가 동원된 실전훈련도 받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5일 대구 중앙교회에서 여선생 박영옥과 결혼했다. 내가 스물다섯, 아내가 스물두 살 때다. 그 아내가 지난 2월 21일 영면했으니 64년을 해로한 셈이다. 아내의 작은아버지인 박정희 중령은 당시 9사단 참모장으로 전방에 있을 때여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전날 밤 부관(副官) 편에 결혼 축하편지와 함께 GMC트럭에 잔치용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내려 보냈다. 그즈음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오산까지 내려왔다. 마침 밴플리트 대장이 미8군 및 유엔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는데 공산군을 공격하는 요령을 미군 중에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장군으로 통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엔 물량공세가 최고의 공격수단이다.

 내가 52년 말(6사단 19연대 시절) 경험해봤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라는 게 산의 북사면 (北斜面)을 기어 올라오면서 때리면 소리 나는 건 모두 동원한다. 양철통·북·꽹과리·사발 등을 두드리면서 ‘덤벼 봐’라는 뜻의 “라이라이(來來)” “라이라이”를 외치며 달려오면 뒷머리가 쭈뼛 올라선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전 같으면 대대나 연대에 하나밖에 없던 105㎜ 대포를 3~4배 늘려 대포가 주력이 되는 반격 방식을 택했다. 중공군 입장에선 여기 가도 포탄, 저기 가도 포탄이 떨어지니 정신이상 상태에 빠진다. 밴플리트는 이렇게 중공군의 남하(南下)를 막아내고 숨쉴 시간을 벌었다. 그런 뒤 “이 전쟁은 상당히 길게 간다. 우수한 한국 장교를 대대장 요원으로 양성해야겠다”며 후보를 뽑았다. 거기서 선발된 인원이 1차 도미장교단 250명(보병장교 150명, 포병장교 100명)이었다. 나도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에서 훈련받는 교육생으로 선발됐다. 중공군과 싸우면서 ‘이거 장가 가자마자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 가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부산항에 군악대 연주가 울려퍼졌다. 전선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던 51년 9월 12일이었다. 대위였던 나는 일본 군수물자 수송선으로 쓰인 곤고마루(金岡丸)에 몸을 실었다. 이튿날 도착한 일본 사세보(佐世保)항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미군 해군수송함 제너럴 존 포프(General John Pope)호였다. 1만6000t짜리 수송함의 엄청난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는 깨끗했고 밥도 잘 나왔다. 식사는 양식이었는데 기름진 음식이 내 입맛엔 잘 맞았다. 전우 대부분이 뱃멀미에 시달려 토하고 기진맥진했지만 난 쌩쌩했다.

 바다 위에서 열하루를 보낸 9월 24일 “곧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제너럴 존 포프호가 빨간색 금문교(金門橋) 아래로 지나고 있었다. 눈앞에 샌프란시스코 시가지가 탁 펼쳐졌다. 언덕 경사면에 집과 건물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경치가 기가 막혔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샌프란시스코~ 오픈 유어 골든게이트~”. 몇 년 전 극장에서 봤던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영화 ‘샌프란시스코’ 주제가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조지아주 포트베닝에 있는 미 육군 보병학교였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4000㎞ 여행을 위해 특별열차 풀맨에 올라탔다. 창 밖으로 마주치는 도로는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고 자동차들이 쉼 없이 왕래하고 있었다.

수만 리 이국 땅에서 매일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으면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대륙적이고 여유 있는 평화경(平和境)이었다. 미국이 이래서 강한 나라로구나. 그 힘을 실감했다. 나흘간 열차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첫날 저녁 중대본부 표판 위에 태극기와 함께 내걸린 문구를 보고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 문을 통해 대한민국의 가장 우수한 장교들이 출입한다”고 영어로 써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수한 장교가 돼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고 이 문을 출입하겠노라 다짐했다.

1954년 9월 서울 육군본부에서 미군 사령관 대리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고 있는 김종필 중령.
 교육기간은 6개월이었다. 독도법 같은 일반학과 전술학·화기학을 두루 배웠다. 전투기와 전차가 동원된 실전훈련도 벌였다. 포트 베닝은 요새 같은 작은 군사도시였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가난한 나라 전쟁터에서 건너온 우리에겐 낙원으로 보였다. 파란 잔디밭엔 웃옷을 훌러덩 벗고 누운 아가씨들이 선탠을 하고 있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하며 “이게 천국이지, 뭐겠느냐”고 웃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장교로서 모범을 보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훈련엔 최선을 다해 임했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 노력했다. 하루는 포트 베닝 인근 컬럼버스시 부인회가 우리를 환영 만찬에 초청했다. 우리는 가서 음식을 잔뜩 먹으면 ‘얼마나 굶었으면 저럴까’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했다. 일부러 출발 전 식당에 들러 요기를 했다. 부인회는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우리를 맞았다. 정작 우리는 반도 못 먹고 남기고 말았다. 부인들이 “왜 안 먹느냐. 맛이 없느냐”며 울상이 됐다.

 미군 장병이나 시민들은 6·25에 참전한 미국이 승리할 것이란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건 미국 국민으로서 의무”라는 생각이 투철했다. 평화와 자유는 누가 거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었다.

JP가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 졸업을 앞두고 조지아주의 온천마을 웜 스프링스로 여행을 떠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여름 휴양지다. JP(왼쪽)가 동료와 함께 루스벨트 기념관 앞에 섰다.

우리는 언제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의 번영된 조국을 건설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52년 4월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뱃길, 귀향의 안도감과 전쟁이 한창인 조국의 미래에 대한 상념이 교차했다. 귀국 후 넉 달쯤 있다 육군본부에 전방으로 가고 싶다고 상신했더니 6사단(사단장 백인엽 준장) 19연대로 발령이 났다. 정보참모 겸 수색중대장으로 배치받았다(10월 30일).

 19연대는 강원도 화천의 북한강 지류인 금성천 근방에 진을 쳤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모든 전선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점령하려는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중공군은 강 건너 유승원(육사 8기특별·8~10대 국회의원) 중령의 2대대를 섬멸하기 위해 완전 포위작전을 전개했다. 참호 속의 2대대원들은 변을 흙으로 뭉쳐 바깥에 내던져야 할 정도로 사방이 막혔다. 나는 강변에 10명의 수색대원을 데리고 나가 총을 겨눈 채 엎드려 있었다. 중공군 1개 분대 10명이 우리를 보지 못한 채 아군 지역 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뒤에서 덮쳤다. 순식간에 당황과 두려움에 빠진 적군은 저항 의지를 잃고 손을 들었다. 포로 신문으로 적정(敵情)이 상세하게 파악됐고 2대대를 포위한 남쪽의 적들에 대해 집중 포격이 가해지면서 겨우 퇴로가 열렸다. 유 중령의 2대대(약 500명)는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석 달 만에 사지(死地)를 벗어났는데 전부 도깨비같이 배싹 말랐다.

 중공군을 생포한 뒤 한 달쯤 지났을까. 세밑 금성천의 칼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했다. 연대장인 허영순 대령으로부터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건네주는데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인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출장차 인근 7사단장에게 왔다가 나를 찾은 것이다. 박정희 대령은 “여기 오는 길에 춘천 시장통에서 우연히 애를 업고 있는 옥이를 만났어. 자네가 중공군과 싸우고 있는데 죽을 거라는 소문이 나서 ‘같이 죽으러 왔다’면서 남편을 찾아왔다고 해. 빨리 가봐.”

 ‘옥’이는 아내 박영옥이었다. 연대장 허 대령은 고맙게도 자기 지프에 쌀 한 가마니를 실어주고 아내를 만나고 오라고 했다. 춘천 거리는 폭격으로 집과 건물이 다 무너진 쑥대밭이었다. 급히 가서 보니 아내는 소양강 옆에 가마니로 바람막이를 하고서 애를 데리고 있었다. 아내는 “대구에서 서울까지 군수용 화물열차를 타고 왔어요. 서울서 춘천까지는 GMC 군용 트럭에 태워 달라고 했고요. 당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해서 무작정 올라왔어예”라며 엉엉 울었다. 돌 지난 딸 예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다녔다. 연락병에게 부대에서 모포 대여섯 장을 가져오게 했다. 부대를 출퇴근하면서 일주일을 함께 지낸 뒤 아내를 대구로 내려 보냈다. 그때 40만~50만 군인 중에서 남편이 죽을지 모른다고 얼굴이 시커멓게 돼 가지고 그 고생을 하며 최전방까지 찾아온 여자가 또 있을까. 아내 박영옥은 그런 여자였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제임스 밴플리트(James Van Fleet·1892~1992)=한국전쟁 당시 주한 미8군사령관(51년 4월~53년 1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90사단장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벌지(Bulge) 전투에서 활약했다. 6·25 남침 땐 기준량의 다섯 배가 넘는 포탄을 퍼붓는 무차별 포격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퇴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외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 공군 대위가 B-26 폭격기 조종 중 적의 대공포를 맞아 실종됐을 때 구출작전 중단을 지시했다. 53년 육군 대장으로 퇴역한 뒤에도 한국 재건사업에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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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