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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Special Knowledge <571> 대북 삐라

노진호 기자
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4월은 ‘대북삐라’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남측 민간단체가 대북삐라를 주로 살포하는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일대에 대한 군사적 보복을 언급하며 때때로 남한을 위협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살포지역 마을 주민들과 대북삐라 살포 민간단체간 실랑이까지 일어나 남북 갈등을 넘어 남남 갈등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남북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북삐라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소리 없는 종이폭탄 … 한국전쟁 때 유엔군 25억장 뿌려
벽보·광고지 뜻하는
영어단어 bill
일본식 발음 기원설
2004년 6월부터
국방부는 살포 중단
탈북 민간단체 중심
비닐풍선 날려 보내

별장 의미 villa에서 파생설도 돌아



  삐라의 어원은 벽보나 광고지를 뜻하는 영어단어 ‘bill’의 일본식 발음 ‘비루’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비루’가 ‘삐라’가 되는 과정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별장을 뜻하는 ‘villa’에서 ‘삐라’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1872년 영국인 존 레디 블랙이 창간한 ‘일신진사지(日新眞事誌)’에는 “‘삐라’는 별장을 뜻하는 ‘villa’에서 파생됐다”고 적고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 메이지시대에 카루이자와(輕井澤)와 이즈(伊豆) 등지에 외국인 전용 별장이 들어섰다. 그곳에선 별장 판매를 위한 광고지가 도처에 붙여졌다. 광고지에는 첫 줄에 일제히 ‘VILLA’라고 적혀 있었고 해당 빌라의 부동산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곳을 드나들던 일본인들이 별장을 ‘비라’라고 서툴게 발음하게 됐고 이와 함께 별장에 붙어 있는 광고지 자체를 비라라고 부르는 습관이 널리 퍼졌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좀 더 세게 발음되면서 ‘삐라’가 됐다는 게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지난해 10월 경기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주차장에서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대북전단 풍선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사진을 매달아 띄우고 있다.


유엔군, 삐라 90%는 B-29 이용해 살포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는 무력 충돌과 함께 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삐라는 ‘소리없는 종이폭탄’으로 불리며 심리전의 대표 수단으로 떠올랐다. 남북은 서로 뒤질세라 삐라 폭탄을 한반도 상공에서 뿌려댔다.



 처음 삐라가 뿌려진 건 전쟁 발발 사흘뒤인 6월 28일이다. 미 육군 극동군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은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심리전과에 지시해 1200만장의 삐라를 살포했다. 하지만 대상은 북한군이 아니라 남한의 주민들과 군인들이었다. 지금의 위치를 최대한 지키고 끝까지 항전할 것, 그러면 미국과 우군들이 한국을 지원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북한군을 대상으로는 7월 17일 신문 형식의 삐라가 처음 발행·살포됐다. 이들 삐라의 내용은 대부분 상대편 병사의 귀순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김영희 교수가 ‘한국 전쟁기간 삐라의 설득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당시 살포된 삐라 448건(미군 등 유엔군 189건, 북한군 198건, 중국군 30건, 북한+중국군 31건)을 분석한 결과 귀순(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이 전체의 34.6%(155건)로 가장 많았다. 당시 유엔군 삐라 중 하나는 ‘안전보장 증명서’란 제목 아래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란 경고를 아래와 같이 담았다.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국제연합군 쪽으로 넘어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환영하고 잘 대우하겠읍니다. 좋은 음식도 주고 치료도 하겠읍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아래 쓴 영문은 맥아더 장군이 모든 국제연합군과 대한민국군은 북한군 포로를 잘 대우하라고 한 명령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향수를 자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내용이 16.3%(73건)였으며, 이간획책(12.3%), 휴전회담 촉구와 전쟁평화반대 주장(9.8%),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7.3%) 등 순이었다. 이를 보면 양측은 공통적으로 삐라를 통해 적군의 귀순 및 전의 상실 유도를 제1목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유엔군(미군)이 한국전쟁 기간에 뿌린 삐라의 양은 1950년 6월~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25억 장 이상으로 추정된다. 보통 삐라의 크기가 엽서 한장 크기(17㎝x10㎝)였기 때문에 이는 한반도를 20번 정도 덮는 분량이라고 한다. 삐라들은 대부분 항공기를 통해 직접 살포하는 방식으로 투하됐다. 유엔군(미군) 측은 전체 삐라의 90% 정도를 B-29폭격기를 이용해 살포했다.



 비닐풍선 속 최대 50만장 … 1달러 함께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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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이후에도 한반도에서의 삐라 살포는 이어졌다. 남한은 국방부가, 북한은 인민무력부가 전담했다. 특히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 등이 발생했던 1970년대 중반 남북 갈등이 극에 달하자 심리전의 일환으로 삐라 살포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자 1975년 3월 당시 이원경 문공부장관은 “북한공산집단이 대남선전공세를 격화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과 허위선전에 현혹되지 말라’는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국방부가 대북삐라 살포를 중단한 건 2004년 6월부터다. 6월 4일 남북장성급 회담을 통해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며,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을 제거하자’고 한 이른바 ‘6·4 합의’의 결과물이었다. 이후부터는 탈북 민간단체들이 대북삐라 살포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민간단체가 탈북자 박상학(46)씨가 2007년 설립한 자유북한운동연합이다. 2000년 탈북해 남한으로 온 박 대표는 2004년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에 근무할 때부터 대북삐라를 보내왔고 2007년부터 정기적으로 살포하고 있다. 박 대표가 홈페이지에 올린 대북삐라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초기에서 문구점에서 파는 15~17인치의 고무풍선을 이용했으나 보내는 양과 질, 실용성 면에서 실패에 가까웠다. 국방부 심리전단에서 만든 것처럼 해서 북한에 삐라를 보내고 싶었지만 예산이 많이 들어 포기하고 수십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값싼 비닐풍선을 제작하게 됐다. 타이머도 기계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고 화학적 방법으로 만들었다. 예컨대 애드벌룬 하나 제작하는데 국방부 심리전단의 것보다 10분의 1 정도 가격이 싸다 … 전단지를 받아보는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수 백장 중 한 장 속엔 1달러를 넣어 보낸다.(1달러는 북한돈으로 3000원) 타이머 시간조절, 날씨, 풍속과 풍향에 따라 전단지 도착지가 결정된다.”



 박 대표는 삐라를 보낼 때 최소 20만~30만 장, 최대 50만 장 정도를 띄워보낸다. 시기적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10월 중 풍향 및 풍속이 좋은 날 보낸다. 박 대표는 “1년을 100으로 치자면 30 정도만 삐라를 보내기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삐라 내용은 북한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대부분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비판하거나 김씨 일가의 사치생활을 비난한다. 삐라와 함께 미화 1달러, 한국의 경제 발전상이 담긴 DVD, USB, 휴대용 라디오, 소책자 등을 삐라와 함께 보내기도 한다. 박 대표는 대북삐라 살포를 두고 마을주민·정부 관계자 등과의 소위 ‘남남갈등’이 심화되자 지난해 11월 비공개로 대북전단을 보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난달에는 대북삐라 살포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측이 천안함 폭침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4월 중 비공개로 대북삐라를 띄우겠다고 번복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외에도 일부 탈북 민간단체 및 국민행동과 같은 보수단체들도 비정기적으로 대북삐라를 날려왔다. 1995년 탈북한 이만복씨가 대표로 있는 기독탈북인연합도 북한 주민 선교를 목적으로 작성된 대북삐라를 살포하고 있다.



 “북 주민에게 진실 전달” vs “주요 도시 못가”



1950년 6.25 전쟁 당시 ‘소리없는 종이 폭탄’으로 불렸던 삐라. ① 유엔군이 인민군 장병에게 뿌린 삐라. ‘총을 머리위로 올리고 넘어오면 보호해주겠다’며 귀순을 유도했다. ②‘쏘련과 중공을 위해 죽음을 택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전의 상실을 노렸다. ③ 북한이 남쪽으로 보낸 삐라. ‘미국놈은 조선민족의 흉악한 원수’라고 쓰여있다. [중앙포토·김영희 교수]


  효과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최소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효과가 없다면 북한이 저렇게 극심하게 반발하겠느냐”고 묻는다. 실제 1950년 존스홉킨스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그해 9~11월 전쟁 포로를 조사한 결과 33.1%가 항복의 이유로 ‘심리전’을 들었다. 한국전쟁 직후 삐라의 효과에 대해 미국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도 비슷하게 나왔다. 1951년 미국이 북한군 사병 80명, 북한군 장교 40명, 중국군 사병 20명을 심문조사한 결과 삐라가 항복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대답이 50% 이상이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북한병사는 55%, 북한장교는 53%, 중국병사는 67%가 삐라가 항복을 생각하는 데 영향을 주거나 항복 결정·실행에 자극이 됐다고 답했다.



 박상학 대표는 “남한에서 북한 인권 운동한다면서 체제를 비판해봐야 북한 주민들은 모른다”며 “삐라는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반면 효과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미국의 자체 조사에 대해서도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라서 신뢰성이 의심된다고 반박한다. 북한이 반발하는 것도 대북삐라의 내용 자체가 ‘최고 존엄에 대한 모독’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상학적으로도 평양 등 북한 주요 도시에 살포될 가능성이 상당히 낮고 대부분 산이 많고 민가가 적은 북한의 강원도 남쪽 지역이나 동해에 뿌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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