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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피겨 인생 50년 이인숙씨

 
이인숙씨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태릉 스케이트장을 다시 찾았다.


김연아 선수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새로 썼다. 김연아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전 국민은 마음을 졸이며 지켜봤고,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행복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을 김연아란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어디 그렇겠는가. 그가 세계적인 선수가 될 때까지 기반을 닦은 피겨스케이터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이인숙(60)씨다. 60년대 처음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가 됐고, 20여 년간 피겨 선수를 육성하는 코치로 살았다. “평생을 얼음판 위에 살면서 피겨스케이팅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이인숙씨의 인생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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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동대문경기장서 밤샘 연습하며 12세 첫 태극마크
은퇴 후 지도자...국가대표 산실 '인숙 스포츠 클럽' 열어
김연아 발굴한 류종현 코치 키워내고 올림픽 6명 출전시켜



이인숙. 일반인들 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빙상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다. 12세부터 피겨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했고, 지도자로서 올림픽에 6명의 선수를 출전시켰으며, 올림픽·아시안게임 총감독과 국제심판을 지냈다. 20년간의 코치·감독 생활을 통해 그가 배출해낸 선수들은 지금 모두 한국 피겨계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국제빙상연맹(ISU) 스페셜리스트인 변성진,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한 지현정, 김연아의 코치로 유명한 류종현까지 모두 이씨의 제자다.

그의 가족도 모두 빙상 국가대표 선수였다. 남편 이익환씨는 68년 프랑스 그레노블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고, 큰아들 규혁씨는 15세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돼 올림픽에 6번이나 출전했다. 둘째 아들 규현씨도 1998년 2002년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겨울올림픽에 참가했다.

 
유일무이한 ‘피겨 대디’ 아버지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빨간 스케이트를 신고 효창운동장 스케이트장에 스케이트를 타러 간 모습. 첫 스케이트로 7세 때였다.
걸출한 운동선수 뒤엔 늘 헌신하는 부모가 있다. 겨울 스포츠인 피겨는 더 심하다. 피겨 꿈나무들의 연습장 주변에 그 부모들이 코치 겸 매니저로 따라다닌다.

이씨가 스케이팅을 시작했던 60년대도 그랬다. 당시 피겨 선수들이 연습하던 동대문 스케이트장 근처로 이사를 오는 맹모(孟母)도 있었다. 이씨의 뒤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이씨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건 초등학교 1학년 일곱 살 때였다. “당시 살던 성북구 보문동 집 근처에 개천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개천 얼음 위에서 애들이 스케이트를 탔어요. 나도 타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사달라고 졸랐죠.” 무남독녀 외동딸의 요구라면 하늘의 별도 따줄 것 같았던 아버지는 그해 크리스마스에 빨간 스케이트를 선물로 사줬다.

처음엔 효창운동장 야외 스케이트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다. “그때 내가 잘 탔나봐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잘 탄다’ ‘예쁘다’ 하니까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셨던 것 같아요. 스케이트를 계속 타게 하시더라고요.” 다음 해에 집에서 가까운 곳에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기면서 부모님과 함께 자주 들렀다. 처음엔 그냥 놀이하듯 타다가 얼마 후부턴 스케이트장에 상주하는 강사에게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권투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혹독한 트레이너였다. 운동 외에는 모두 딸의 결정을 따라줬지만 운동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서 동대문 스케이트장까지는 언제나 뛰어서 가야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일이 있어 혼자 동대문까지 걸어간 적이 있어요. 그걸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길에 보시곤 무섭게 혼을 내셨죠.” 그날은 매일 1000번씩 하던 줄넘기를 벌로 1만 번도 넘게 했다. 운동 외에 음악과 무용도 배워야 했다. 당시엔 음악과 무용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 있던 해외 공연단의 무용·음악 감독에게 이씨의 연습을 부탁했다.

“무용 연습을 할 땐 팔을 올린 모양이 예쁘지 않다며 8시간 동안 팔을 들고 있게 해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렇게 엄하셨죠.”

피겨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집이 경제적으로 아주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다. “둘 중 한 명이 버는 건 모두 나한테 다 투자했어요. 온 힘을 다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있었을 텐데 아버진 제가 그런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운동만 하게 하셨어요.” 아버지는 밤에만 일을 했다. 낮엔 딸을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딸에게 희생했던 아버지였지만 이씨가 자립심을 가지길 원했다. 무슨 문제든 스스로가 해결하게 했다. 학교에서 싸우고 와도 “가서 혼자 해결하고 오라”고 했다. “나를 아주 강하게 키우신 거예요. 그 덕에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한테 의지한 적이 없어요.” 이씨는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고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자립심, 그것이 이씨를 지금까지 지켜준 버팀목이 됐다.

한국 피겨 출발점,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

60년대는 스케이트의 인기가 높았다. 겨울이면 공터와 논밭에 물을 채우고 얼음을 얼려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다.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였다. 극장이나 롤러스케이트장과 더불어 스케이트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케이트 인구가 많아지면서 64년에 창신동에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는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기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씨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을 “한국 피겨의 첫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인숙씨가 경희대 3학년 때 아버지 이금동씨와 함께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 권투 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이씨의 코치이자 멘토였다.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장명수 선수와 홍혜경·김영희 선수가 다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함께 운동했다. “동대문 스케이트장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선수들이 운동할 공간이 생겼어요. 거기서 처음 체계적으로 훈련한 선수가 배출됐고 그 뿌리가 번져 나간 거죠.” 그 전에도 피겨스케이터들이 있었지만 국제 경기에서 통용되는 기술을 제대로 연마한 건 아니었다. 일본에서 배워온 생활체육 수준이었다.

당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여름엔 문을 닫았다. 여름엔 체력 강화를 위한 지상운동을 했다. 당시엔 전지훈련도 잘 못갔다. 한국 선수가 전지훈련을 간 건 88년 서울올림픽 무렵에 와서다. 이후 어린이대공원 야외 스케이트장, 롯데·목동 아이스링크가 생기면서 훈련 여건이 나아졌다.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이후 스케이트 인기가 시들해지며 경영 악화로 85년 문을 닫았다.

대회마다 각축전 벌인 라이벌 장명수

“내 라이벌은 장명수였어요.” 장 선수는 어려서부터 이씨와 스케이트를 함께 탄 동갑내기로 72년 삿포로 올림픽부터 74년 뮌헨 세계선수권대회까지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 친구는 집이 워낙 잘살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캐딜락 타고 다녔으니까요. 하지만 실력은 제가 더 나았다고 생각해요.” 당시 피겨협회 회장이었던 장 선수의 아버지 장기섭 회장은 딸을 위해 동대문 스케이트장을 하루 5시간씩 대관해줬다. 일본에서 유명한 코치도 데려와 훈련시켰다.

그에 반해 이씨는 일반 개방시간에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연습량이 적으니 점점 실력이 벌어졌다. 이를 안타까워한 아버지가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근무하던 고향 선배에게 부탁해 밤 12시부터 스케이트장의 문을 살짝 열어줬다. 조명 하나만 켜고 아침까지 밤을 새며 훈련을 했다. 어린 초등학생이 밤새 스케이트를 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 했어요. 우리 땐 운동이 스파르타식이라…. 하면 하는 거지 변명이 필요 없었어요.” 가뜩이나 엄한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따라야 했다.

장명수와는 대회마다 각축전을 벌였다. 컨버서리 피겨(도형을 그리는 종목)는 이씨가 우위였다. 스케이트로 원을 그리면 10번을 돌아도 얼음엔 가는 줄 하나만 그려졌다. “훈련을 하다보면 그 얇은 선 하나가 차도만큼 넓어 보였죠.”

그와 함께 운동했던 선수들은 모두 미국과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이씨는 한국에 남았다.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집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어요. 게다가 한국에서 아버지가 24시간 따라다니며 운동했는데 외국에 혼자 나가서 제대로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셨죠. 차라리 한국에서 믿을 만한 대학에 가는 게 낫다고 하셨어요.”

원망도 많이 했다. 앞선 외국 기술을 익힐 수만 있어도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이벌 장명수는 중학교 때 이미 해외에 많이 나가 세련된 스케이트를 탔다. “삿포로 올림픽 때 명수가 갔어요. 그걸 보고 좌절 많이 했어요.” 당시 올림픽엔 한 명만 나갈 수 있었는데 친구 장명수가 나갔고 이후 국제대회에도 연달아 나가자 실망한 이씨는 슬럼프에 빠졌다. 경희대 4학년을 마지막으로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장명수는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유학을 떠났다가 스케이트를 그만두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독종 선수에서 독종 코치로 20년

대학 4학년부터 20여 년을 코치로 살았다. 선수 때보다 코치로서 더 높은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는 코치 생활을 반대했다. “평생 스케이트 하느라 힘들었는데 왜 코치까지 하려고 하냐”고 말렸지만 이씨는 생각이 달랐다. 선수로 못다한 꿈을 제자들을 잘 키워 이루고 싶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0시간 이상을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뛰어 다니며 가르쳤다. 아침에 스케이트를 한번 신으면 끝날 때까지 벗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단련 받은 체력을 다른 코치들이 쫓아올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르친 근성도 발휘됐다. 지는 게 싫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조련사’ ‘독종’이라고 불렀다.
 
피겨 남녀 싱글 선수 정성일, 변성진의 감독으로 참가한 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 인숙스포츠클럽 선수단이 올림픽 폐막식에서 부채춤 공연을 했다.


열성적으로 하는 만큼 선수들의 실력이 좋아졌다. 국가대표 코치만 15년을 했다. 선수들이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자 학부모들이 물밀듯 찾아왔다. 하지만 아무나 제자로 삼지는 않았다.

“내가 워낙 도도하고 건방진 코치로 정평이 났었어요.” 부모의 성품이 별로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가르치지 않았다.

“돈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선수를 만드는 게 중요했고,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어요. 그게 자존심이었고 돈을 천만금을 줘도 그 자존심과는 바꿀 수가 없었죠. 그때 좀 고지식했어요.”

학생이 많아지면서 ‘인숙 스포츠 클럽’을 설립했다. 한 번에 15~20명의 학생을 초급반부터 선수반까지 나눠 가르쳤다. 사설 스포츠 클럽으로는 처음으로 우크라이나로 단체 전지훈련을 떠나기도 했다. 이씨의 스포츠 클럽 제자 중 6명이 올림픽에 출전했다. 84년 사라예보 겨울올림픽에 나간 김혜성 선수를 시작으로 변성진, 정성일, 이은희, 아들이자 제자인 이규현 등이다. 김연아를 발굴한 류종현 코치도 이인숙 회장의 제자다. 그는 롤러스케이트 선수였는데 페어스케이트 선수를 찾던 이씨가 류종현의 재능을 알아 보고 발굴했다.

42세가 되던 해 그는 코치 생활을 접었다. 처음 코치를 시작할 때부터 가졌던 계획이었다. “제자들이 지도자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하던 일을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코치하면서 힘들었던 걸 제자들이 겪지 않도록 기반을 닦는 일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그후 대한빙상경기연맹 심판이사, 과천체육센터 기획실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는 국내 심판으로 3년간 일한 후 45세 되던 해 아시안게임에선 국제 심판으로 일했다. 용평 겨울 아시아게임과 솔트레이크 겨울올림픽 총감독을 맡았고 15년간 국민생활체육 전국빙상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아주 특별한 애”였던 초등생 김연아

“하루는 과천 스케이트장에서 코치로 일하던 류종현이 “선생님, 아주 특별한 애가 왔어요. 소질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에요”라고 하더군요. 한번 보긴 했지만 그땐 김연아가 하도 어려서 ‘지켜봐야겠구나’ 정도였어요.”

그가 심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초등학생이던 김연아는 팔다리가 길고 가늘었다. 얼굴도 작아 서구적이었다. 그에 반해 아사다 마오는 전형적인 동양인 체형이었다. 스케이팅 스타일도 달랐다. “아사다 마오는 딱딱 끊기는 스타일이고 연아는 길게 늘어지는 스타일인데 국제 심판들이 연아 스타일을 좋아하더라고요. 평가가 좋았어요.” 국제 심판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는 걸 보고 ‘김연아는 잘 키우면 세계대회에서 5등 안에 들 수 있겠다’ 했다. 차츰 성장하던 김연아는 2004년 헝가리 ISU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결정타를 날렸다.


2004년 김연아 국제무대 데뷔 땐 심판으로
아시안게임, 올림픽 총감독..."피겨에선 내가 할 건 다 했어요"
빙상 가족...아들 이규혁에겐 "잘할 거야" 격려만 하는 엄마



그 대회에 이씨는 국제 심판 자격으로 김연아와 함께 헝가리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 트리플 악셀을 뛴다는 아사다 마오가 함께 출전했어요. 아사다 마오는 신동 소리를 듣는 선수였죠. 그런데 아사다를 제치고 김연아가 우승을 해버린 거예요. 그것도 첫 번째 출전하는 국제대회에서.” 그때부터 김연아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씨는 좋은 선수가 되려면 스승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선수 엄마들은 코치를 쉽게 바꾸려고 해요. 하지만 알아야 할 건, 김연아는 아주 특이한 선수예요. 그런 선수는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해요. 그만큼 뛰어나다보니 코치에 대한 만족도가 낮을 수 있었겠죠. 그래도 선수와 스승 사이에는 존경을 기반으로 한 끈끈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자도 스승을 존경해야 하고 스승도 제자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게 해야죠.”

빙속 레전드 이규혁 엄마로서의 이인숙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빙상장에서 이인숙씨와 아들 규혁(왼쪽), 규현 형제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일선에서 물러선 이씨는 이제 ‘피겨스케이터’보다는 ‘이규혁 엄마’로 더 유명하다. 이씨는 “나는 밥 해주고 챙겨주는 엄마는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보다 아들이 운동하는 데 필요한 게 뭔지 살피는 게 먼저인 엄마였다. “내 아버지가 했던 대로 나도 애들이 다른 부분에 일절 신경 안 쓰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로서는 아이가 좌절하거나 슬럼프가 올 때면 용기를 주는 역할을 했다. 이규혁 선수가 “엄마는 맨날 ‘넌 잘할 거야’라고만 하더라”라고 오히려 화를 낼 만큼 “넌 잘할 수 있어”란 말을 반복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즐기면서 운동해라. 그래야 성과가 있다”로 말이 바뀌었다. 종종 “운동하기 싫으면 그만 둬라”라고 질책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이규혁은 싫다는 말을 한 번도 안했다고 한다. “뭘해도 다 1등 했어요. 바이올린이나 주산을 시켜도 잘했고요. 엄마가 잘 못 돌봐주는데도 기죽지 않고 당시 살던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도 골목대장을 하더라고요.”

지난해 소치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이규혁이 은퇴했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때 마음은 아휴(한숨)…. 말로 표현할 수 없지. 다른 대회에선 다 1등했는데 올림픽 금메달만 못 땄어. 그러면서도 자신이 스스로를 ‘부족한 선수’라고 겸손하게 말하는데…. 엄마로서 선배로서 규혁이를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해요.”

이씨는 “피겨에 있어서는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고 했다. “선수도 했고 그때 부족했던 걸 코치·감독하면서 다 이뤘죠. 좋은 선수 발굴해서 올림픽에 내보내고 국제심판도 하고요. 피겨에서 내가 할 건 다 했어요. 피겨 인생의 종착점이요? 그건 생각 안 해봤지만, 변하지 않는 건 내가 피겨인이라는 거죠. 죽을 때까지 한국 피겨스케이팅에 ‘이인숙’ 이름 석 자는 안 없어지겠죠.”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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