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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노후에 쓸 비자금 좀 만들어 놨나요?

서명수 객원기자
“노후엔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비자금이 얼마 정도는 있어야 해. 그 돈 만들어놨어?”
“아뇨. 아내하고 공인인증서도 공유하는 판인데.”
“그러다 내 꼴 나면 어쩌려고. 배우자 몰래 쓸 비자금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아.”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선배 하나가 후배들한테 건넨 이야기다. 그는 공기업 감사를 마지막으로 지난해 말 퇴직했다. 입사 후 승승장구, 요직을 두루 거쳐 그런대로 직장생활을 행복하게 누린 편이었다. 하지만 퇴직하고 나니 하루 아침에 현역시절의 풍족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쪼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회사를 나오니까 도무지 품위 유지가 안 되는 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인한테 한 달에 용돈조로 30만원씩 받았으나 교통비를 겨우 충당하는 정도였다. 친구나 후배들을 만나면 밥값·술값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걸로는 열흘을 버티기도 어려웠다. 임원까지 지낸 터라 이곳 저곳에서 청첩장이다, 부고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날아 왔다. “수입도 없는데 분수를 알아야 한다”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내를 살살 달래 용돈을 올려달라고 해 봤지만 겨우 50만원에서 타협을 보았다. 결국 지갑이 텅 비다시피 하니 모임 참석은 웬만하면 피하게 되고 동네 문화센터 등에서 하루를 때우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제서야 퇴직 이후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더라는 것이다.

비자금은 필요악

비자금. 뭔가 음습한 구석이 있는 돈이다. 외부에 공개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검은 돈이나 재벌의 탈세자금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부부 사이에서도 ‘비밀’ ‘배신’ 등의 단어와 연결되곤 한다. ‘은닉’ 문제도 생긴다. 비자금 통장을 감추는 것도 신경 쓰여지는 사안으로 온갖 꼼수가 동원된다. 회사 책상, 이불 속, 싱크대 밑 등 배우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면 어디든 비자금이 숨어든다. 보험회사에서 취급하는 저축성 보험도 비자금의 은닉처로 활용된다. 그러다 들키면 가정파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날 저녁 집안 공기가 탁해지는 건 불문가지.

그래서 비자금이란 말은 입밖으로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비자금의 효용성 또한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규모가 크면 의도를 의심받을 수 있지만 적당한 금액은 오히려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필요악’인 셈이다. 그러나 비자금이라는 게 돈이 없을수록 아쉬운 법이다. 소득이 확 줄어드는 노후엔 더욱 그렇다. 현역 때야 가끔 눈 먼 돈도 생기고 해서 비자금을 조성할 기회가 많겠지만 노후엔 그렇지 못하다.

퇴직 후에도 인간관계와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분위기상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현역 때와 달리 우연한 공돈이 생길 일이 거의 없는데, 배우자 몰래 소비해야 할 경우도 생긴다. 더구나 월급쟁이들은 대개 퇴직하면 가정의 경제권이 부인에게 넘어간다. 용돈을 받아쓰는 남자의 생활은 팍팍하다. 후배에게 술 한잔 사기 쉽지 않고 꼭 챙겨야 할 경조사에도 치사하게 굴어야 한다. 용돈 좀 올려 달라고 했다간 “나는 생활비 한 푼에도 벌벌 떨며 사는데,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느냐”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 부부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심하면 부부싸움으로 확전된다. 이럴 때 아내 몰래 모아둔 비자금이 있다면 이런 극한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어쩌면 남자들의 노후생활의 질은 비자금과 상관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아내의 눈치를 안 보며 쓸 수 있는 비자금의 규모에 따라 노후의 품위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직 후 아내가 주는 용돈의 범위 내에서 알뜰살뜰 사는 남자들도 많지만, 앞의 공기업 감사를 지낸 선배처럼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는 지금 재취업 자리를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만약 재취업에 성공하면 무슨 수를 쓰든 비자금을 만들어 놓겠다고 했다. 그게 자신의 노후를 위해, 아내와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길이라는 것이다.

딴주머니 애써 들추지 말아야

노후에 비자금이 필요한 건 여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남성보다 평균 3~4년 더 오래 산다. 혼자 살아야 하는 기간이 더 긴 만큼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꼭 독거생활 대비용이 아니라도 비자금이 있으면 남편과 자식, 주변으로부터 당당해질 수 있다. 여성들은 비자금이 필요한 이유로 심리적 안정감을 첫째로 꼽는다고 한다. 남편들도 아내가 비자금 통장을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하지만 여성은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남편이나 자식이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풀어놓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보다는 가족을 더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유전적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품위유지와 여가, 자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비자금을 썼듯이 여성도 자신의 윤택한 노후를 위해 활용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부부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꾸려가는 공동체인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서로 숨기는 돈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세상은 그렇게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어쩌면 배우자가 나 몰래 딴주머니를 차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남편이나 아내가 집에 돌아오면 슬쩍 한번 떠보면 어떨까. 혹시 딴주머니를 차고 있지 않느냐고. 딱 잡아 뗀다면 그렇게 믿어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혹시 찜찜한 낌새가 잡힌다 하더라도 들춰내려고 애쓰지 말자. 부부 사이에서도 어항처럼 맑고 투명한 돈 관계를 유지하기란 진짜로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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