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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Special Knowledge <568> 영화의 또 다른 기원

이후남 기자
마술과 사진 영화의 역사는 120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단편영화를 공개적으로 상영한 것이 그 출발점으로 꼽히곤 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하루아침에 영화를 ‘발명’한 건 아닙니다. 영화라는 볼거리는 당대의 여러 과학기술적 성과가 축적되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되짚으면 영화의 기원과 또 다른 분야의 교집합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술과 사진입니다.

영상을 투사하다 - 매직 랜턴·판타스마고리아

영화는 가끔 ‘마술’이나 ‘마법’으로 불리곤 한다. 영화에 담긴 상상력이나 표현력 수준이 놀랍다는 걸 가리키는 비유다. 헌데 빛의 힘으로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를 사상 처음 접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자체가 마술이나 마법으로 보이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에 처음 등장한 ‘매직 랜턴’(magic lantern)이 바로 그랬다.

 매직 랜턴은 그림이 그려진 유리 슬라이드에 양초·램프 같은 인공적 불빛을 비춰 스크린이나 벽면에 투사하는 장치다. 그 앞에 렌즈를 부착하면 작은 슬라이드에 그려진 그림을 큼직하게 확대해 비출 수 있다. 광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이 장치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로 알려져 있다. 빛과 운동의 원리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천체 연구로도 이름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다. 토성을 둘러싼 고리와 위성 타이탄을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659년 매직 랜턴을 만들어 목가적인 풍경이나 해골을 그린 그림 등을 선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진기한 장치는 이내 상업적인 볼거리가 되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마술사들은 매직 랜턴을 투과한 기괴한 영상이 마치 영혼을 불러낸 것인 양 보여주기도 했다.

17세기 중반 처음 개발된 매직 랜턴은 18세기 말 로베르송의 활약에 힘입어 한층 정교한 무대 공연으로 발전했다. ‘판타스마고리아’라 불린 이런 공연은 19세기 전반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사진 북산]

 호이겐스가 매직 랜턴을 만들기에 앞서 1646년 독일의 수도사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1~1680)는 영상을 투사하는 장치와 원리에 대해 그림을 곁들여 풍부한 설명을 담은 저서를 펴냈다. 이는 이후 유사한 장치의 개발자들은 물론이고 영화의 역사를 파고드는 연구자들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매직 랜턴이 영화 영사기의 직계 조상은 아니지만,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특히 18세기 후반 에티엔 가스파르 로베르(<00C9>tienne-Gaspard Robert, 1763~1837)의 활약은 이 볼거리가 한층 발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무대에 설 때의 예명인 ‘로베르송’(Robertson)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로베르송은 본래 벨기에 출신으로 물리학을 공부해 광학적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층 개선된 장비를 만들어 ‘판토스코프’라고 이름 붙였다. 대혁명 직후의 프랑스에서 로베르송은 기존의 매직 랜턴보다 한층 정교한 기법을 가미한 공연을 선보여 큰 인기를 누렸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고 불린 로베르송의 공연은 그저 영상만 보여준 게 아니었다. 버려진 수녀원의 성당을 공연장으로 삼아 천둥소리·바람소리·빗소리 같은 음향효과나 뿌연 연기 같은 특수효과를 곁들였다. 여러 개의 광원을 이용하고 빛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영상의 크기가 달라지거나 움직이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여러분이 이제 보실 것은 시시한 구경거리가 아닙니다.(중략)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그림자·영혼·주문 그리고 마술사의 주술적 작업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입니다.” 로베르송은 이 같은 말로 공연을 시작하곤 했다. 곧이어 불이 꺼지고 음향효과가 흘러나오면서 유령 등등의 영상이 등장하면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이런 점에서 현대의 공포영화와 맥이 닿는다. 입체적인 공포 체험이라는 점에서 ‘유령의 집’ 같은 놀이공원 시설의 조상이라고도 할 만하다. 이 같은 공연은 영국과 미국에도 전파되어 19세기 전반까지 인기를 이어갔다. 그림만 아니라 이 무렵 등장한 새로운 매체, 즉 사진을 투사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근대의 과학적 지식이 마술에 쓰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유령의 모습을 당시의 관객들이 진짜 유령이라고 믿기도 한 것은 한편으로 퍽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근 출간된 『호모매지쿠스 마술적 인간의 역사』(오은영 지음, 북산)는 이를 ‘과학과 마술의 접점’이자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근대에 들어 한편에선 과학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반면, 18세기 후반 들어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이성의 힘과 보편성을 거부하고 인간의 감성이나 감정, 특수성을 탐닉하는 흐름이 부각됐다는 것이다.

 판타스마고리아의 이런 성격은 2006년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이 마련한 기획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의 제목은 ‘고딕 나이트메어’였다.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고딕 요소를 화폭에 담아낸 낭만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판타스마고리아를 재현한 볼거리를 선보였다.

움직임을 포착하다 - 마이브리지의 연속사진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1878년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연속 촬영한 사진. 이를 빠르게 연결하면 말이 움직이는 동영상처럼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마술은 종종 눈속임으로 치부되기도 하는데, 따지고 들면 영화에도 눈속임의 요소가 있다. 영화관의 관객들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을 ‘움직인다’고 여긴다. 하지만 영화 필름을 살펴보면 그 실상은 정지된 영상의 연속일 따름이다. 이를 빠르게 보여주면 사람의 눈과 뇌가 ‘움직인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가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을 찍은 일련의 사진은 영화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예고한 듯 보인다. 지금은 사진이 ‘순간 포착’의 예술로 불리지만, 사실 초창기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진이 처음 등장한 19세기 초반에는 감광 과정, 즉 빛의 농도에 따른 풍경의 명암을 화학물질을 바른 판에 고정시키는 데 장장 8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마이브리지가 움직임을 포착한 사진을 찍은 건 19세기 말의 일이다.

 영국 출신인 마이브리지는 미국에서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요세미티 국립공원 같은 풍경 사진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런 그에게 1872년 색다른 일감을 맡긴 사람은 리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1824~1893)였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기도 한 정치가이자 사업가다. 경주마를 소유하고 있었던 스탠퍼드는 그 자신을 비롯해 당시 사람들의 흔한 궁금증을 과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했다. 말이 빠르게 달릴 때 과연 말의 네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지를 사진을 통해 확인하려 한 것이다.

  마이브리지는 말이 달릴 트랙을 따라 12대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각각의 셔터를 시차를 두고 조정하는 장치를 만들어 연속 사진을 찍었다. 궁금증은 해결됐다. 마이브리지가 1878년에 찍은 사진에는 말이 달리는 도중 네 발이 모두 공중에 머문 모습이 뚜렷이 포착됐다. 이후 마이브리지는 카메라를 24대, 48대로 늘려가며 사람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연속해서 촬영하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를 연결해 움직이는 영상처럼 선보이는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라는 장치도 개발했다. 마이브리지는 영국과 유럽 각지를 돌며 자신의 사진을 선보였다. 마이브리지가 남긴 연속 사진을 마치 영화처럼 보여주는 영상은 현재 유튜브 등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이브리지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에티엔 쥘 마레이(<00C9>tienne-Jules Marey·1830~1904)도 사진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과학자였던 그는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자료로 축적해 연구하려 했다. 사진은 특히 연구자의 마음대로 통제가 쉽지 않은 동물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마레이는 기다란 총처럼 생긴 새로운 촬영 장비도 개발 했다. 총의 방아쇠에 해당하는 부분을 당기면 날아다니는 새의 움직임 같은 것을 연속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일종의 카메라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마레이와 마이브리지의 작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영화의 탄생에 고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이브리지의 사진에 관심을 보인 사람 중에는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도 있었다. 이른바 ‘발명왕’으로 불리는 에디슨의 방대한 발명품 목록에는 흔히 영화도 포함되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에디슨과 그의 연구진이 개발해 특허를 얻은 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장비였다. 커다란 상자의 뚫린 구멍을 통해 짧은 영상을 구경할 수 있는 1인용 관람 장치다. 누구나 돈을 내고 관람할 수 있었지만, 이후의 영화가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관람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에디슨 자신도 머잖아 이 같은 방식을 채택한 장비를 새로 개발했다.

 키네토스코프에 곧이어 프랑스에는 시네마토그라프(cin<00E9>matographe)가 등장했다. 뤼미에르 형제가 개발한 촬영기이자 영사기다. 형제는 이 장비를 가지고 직접 찍은 짧은 영상들을 1895년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공개했다. 참석자들은 관람료를 냈다고 전해진다. 대중적인 유료 상영이라는 점에서 이는 ‘산업’으로서 영화의 탄생을 알린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초창기에 뤼미에르 형제가 선보인 영상에는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서는 모습이나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는 모습 등이 담겼다. 이를 처음 본 사람들 반응은 그에 한참 앞서 매직 랜턴의 영상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과 닮은 데가 있다. 달려오는 기차의 모습을 보고 실제인 양 깜짝 놀라 몸을 움찔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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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