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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 피신한 장면 총리 '54시간 부재' … 궐기군 진압 무산 … 반전의 기회 사라졌다

1961년 3월 장면 총리(왼쪽)가 이한림 제1군사령관(중장)과 함께 원주 국토건설사업 시공식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 사령관은 한국 최대 규모 실병력인 20개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포토]


5·16 거사의 최대 피해자는 총리 장면(1899~1966)이다. 그 한 해 전 4·19 혁명은 새 시대를 열었다. 민주당은 총선에 압승했다. 8월 12일 민주당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제 헌법의 국무총리는 권력 실세다. 대통령(윤보선)은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위치였다. 정권 출범 뒤 민주당 내부의 분열, 사회 불안이 이어졌다. 장면 정권의 운신 폭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장면은 군부의 기습을 당했다. 그리고 18일 낮 중앙청(1995년 철거)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그의 내각 총사퇴 의결은 5·16의 성공을 의미했다. 장면의 메모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발발, 박정희 소장 지휘하 군사 쿠데타 발생.” 그는 비운의 정치인이 됐다.



 ‘군사 쿠데타 발생에서 내각 붕괴’까지는 많은 논쟁을 낳았다. 장면의 잠적 때문이다. 16일 새벽 4시15분 장면은 총리 숙소인 반도호텔을 빠져나왔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1군사령관 이한림은 진압과 반격을 모색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군 통수권은 장면이 갖고 있었다. 결정적 순간에 그는 칩거했다. 그 54시간의 연락 두절은 상황 역전의 기회를 상실하게 했다.



이한림은 회고록에서 “장 총리의 지시만 있으면 바로 반란군을 토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장면의 행각이 5·16의 성공을 역설적으로 보장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우리 군끼리의 충돌과 유혈사태가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로 신파인 장면의 정적이었다.



장면도 유혈사태, 이에 따른 북한군의 남침을 걱정했다고 한다. 장면은 거사 상황이 종료된 18일 낮 12시가 조금 넘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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