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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마지막 큰 정치가를 잃은 상실감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헨리 키신저는 리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 있어서 비대칭의 하나는 지도자의 능력과 그가 통치하는 나라의 국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리콴유라는 위대한 정치가는 싱가포르라는 작은 도시국가를 통치하기에는 그 능력이 넘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은 시기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리콴유 찬사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만약 리콴유가 다른 시대에 다른 나라에 살았더라면 그는 세계사에서 처칠이나 디즈레일리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리콴유가 두고 떠난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 5만6000달러의 세계 8위, 아시아 1위의 강소국이다. 그는 1959년 초대 총리가 되어 90년까지 31년 동안 집권하면서 자원 하나 없는 싱가포르를 1인당 국민소득을 400달러에서 1만2750달러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오늘의 싱가포르의 경제적 번영도 그의 장기 개발독재의 연장선에서 실현된 것이다.



 98년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리콴유의 유교자본주의 개발 모델이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해 3월 초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당시)이 그와 마주 앉았다.



 “IMF 체제 아래서 한국이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유대교와 기독교 자본주의에 넘겨주는 것이라는 일부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리콴유의 답변은 짧고 단호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대담중인 생전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오른쪽).
 98년이면 리콴유가 대통령이 되기 전의 김대중과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유명한 논쟁을 치른 지 4년이 지난 때였다. 리콴유는 94년 3월 포린어페어스 편집국장 파리드 자카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문화는 천명(天命)이어서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해 11월호 포린어페어에 김대중의 반론이 실렸다. 김대중은 리콴유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명분을 찾기 위한 거짓 주장이라는 돌직구를 날렸다. 김대중은 동양의 전통 사상이 민주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는 근거로 서양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을 세운 존 로크에 2000년이나 앞서 맹자가 주권재민 사상을, 동학이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설파했다고 지적했다. 리콴유와 김대중의 아시아의 가치 논쟁은 그 정도로 끝났지만 그 화두는 개발독재의 득실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화두로 남았다.



 홍석현 사장이 또 물었다.



 “선임 총리께서는 20~30년 안에 태평양이 르네상스를 맞고 중국이 21세기의 초대형 시장으로 등장한다고 예언하시는데, 아시아 국가들은 수퍼파워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중국은 앞으로 30~50년 안에 대단히 강력한 경제대국이 되겠지만 미국·일본·서유럽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는 데는 한 세대 이상이 걸려요.”



 리콴유는 중국의 덩샤오핑을 만나고 중국을 자주 방문해 중국 개방·개혁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관심이 경제에 치중된 나머지 중국이 군사적으로도 미국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강압외교를 펴는 21세기 초의 동아시아 안보 상황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미·중 패권경쟁은 그의 시야에 들지 않았다.



 리콴유의 업적은 청렴과 공사 구분으로 높은 도덕성의 바탕 위에서 천연자원이 없는 작은 도시국가를 세계 8위의 경제 강소국으로 만들어 제3세계에 하나의 개발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98년 3월 14일자 중앙일보 글로벌 포커스에 실린 글을 보면 리콴유가 어떤 수준의 도덕성을 가진 지도자였는지 한눈에 보인다. 72년 남북한 총영사관은 리콴유를 먼저 만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때마침 리틀엔젤스 가무단이 와서 싱가포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한국 총영사관은 리콴유의 부모를 초대해 맨 앞줄에 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극장 측은 그들을 다섯째 줄에 앉혔다. 한국 측의 이의제기에 극장 측은 “총리의 부모는 일개 시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한국 대통령의 부모가 그런 행사에 갔을 경우를 상상해 보자. 자신이 살던 사저를 헐어버리라고 유언을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가슴 뭉클한 느낌을 준다.



 리콴유는 공무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주문하는 대신 공무원들의 봉급을 민간기업의 115%로 정했다.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의 공무원 봉급이 민간기업의 30~70% 수준이던 때다. 그는 당 태종 이세민처럼 가장 공부를 많이 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버드대학을 방문해 학자들과 토론하고 우수한 젊은 관리들을 국가 장학생으로 미국과 유럽에 유학 보냈다. 리콴유의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하겠지만 우리는 마지막 남은 큰 정치인이 떠난 상실감을 많이 느낄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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