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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기정사실 만든 궐기방송 … 최초의 질서가 탄생했다 … 장도영 "출동부대 돌아가라" … JP "허튼짓 하면 엎으려 했다"

1962년 5월 16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 둘째)이 5·16 거사 1주년을 맞아 안국동 광명인쇄소를 찾았다. 왼쪽부터 김용태 정보부장 고문, 이학수 광명인쇄소 사장, 김 부장, 이낙선 최고회의의장비서관. 김 부장은 이낙선 소령과 광명인쇄소에서 ‘5·16혁명취지문’과 포고문 30여 만 장을 찍는 일을 독려했다. 이학수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무료로 인쇄해줬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5월 16일,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다. 그 격한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 수단은 선제 공세와 신속한 기정사실화다. 상대의 허(虛)를 찌르고 심리전도 펼쳐야 한다. 궐기군의 세력은 작다. 전체 60만 대군 중 3600명에 불과하다. 기습적인 상황 장악으로 장애를 돌파해야 한다. 그 기세로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 5·16 D데이의 24시간
새벽 5시 KBS 박종세 아나운서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 첫 방송
박정희, 육본에서 장도영과 담판
"조국에 반역이 되면 자결하겠다"





16일 새벽 4시15분 김윤근 준장과 오정근 중령의 해병1여단은 한강다리를 돌파했다. 선두 해병대 대열의 박정희 소장은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왔다. 그는 총격전의 흥분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에게 혁명 취지문을 건넸다. 막 인쇄된 활자의 냄새가 풍겼다. 박 소장은 차분하게 자세를 바꿨다. 혁명의 격문을 한 자 한 자 점검했다. 그리고 박 소장과 나는 남산의 KBS 라디오방송국으로 향했다. TV가 없던 시절이다. 방송국은 공수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숙직 직원 대부분이 도망쳤다. 우리는 “박종세 아나운서(당시 26세),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는 조그만 외신(外信) 텔레타이프실의 책상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는 와들와들 떨었다. “공비(共匪)가 나타난 줄 알고…”라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안심시켰다. 6개 공약이 들어 있는 혁명취지문을 주었다. 박종세는 ‘혁명’이라는 글자에 흠칫 놀랐다. 나는 그에게 방송요령을 주문했다. “‘오늘은 국민 여러분께 중대한 발표를 해드리겠습니다’란 말을 먼저 한 뒤 차분하게 읽어 달라”고 했다. 도망쳤던 기술요원들도 공수부대원들이 찾아 데려왔다.



 박 소장과 우리 일행은 스튜디오 바깥 유리창을 통해 박종세의 방송을 지켜봤다. 애국가가 울렸다. 이어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微明)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 떨렸다가 차츰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그 방송은 역사 전환의 거대한 굉음(轟音)이었다. 혁명은 이제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송은 구시대의 낡은 질서에 치명타를 가했다. 기정사실화의 효과다. 우리의 혁명은 분수령을 넘고 있었다.



 방송은 작전 신호였다. 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여러 부대도 궐기했다. 지역 행정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났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군부의 심장부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삼각지 육군본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박 소장은 이날 새벽에 장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혁명을 진두지휘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었다. 편지는 “참모총장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叛逆)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로 돼 있다. 박 소장은 자신의 결연과 비장함이 전달되길 바랐을 것이다.



 육본광장은 6군단 포병대 1300여 명이 점령하고 있었다. 6군단 포병대는 혁명부대 최초로 서울로 진입한 부대다. 해병대 1개 소대가 본부건물을 포위했다. 그 순간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다.



 박 소장은 2층 총장실로 들어갔다. 장 총장과 대좌(對坐)했다. “혁명군 선두에 서달라”는 박 소장의 요청을 장도영은 거절했다.



5월 16일 새벽 5시 궐기문을 낭독했던 박종세 아나운서. [중앙포토]
 이어 오전 8시 담판이 벌어졌다. 장 총장의 군부지휘부와 박 소장의 혁명군 주체들 사이에 합동회의가 있었다. 장 총장은 이성호 해군·김신 공군 참모총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을 불러놨다. 주변엔 군사혁명 참여 장교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박 소장=“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출동할 때 유서를 쓰고 손톱까지 깎아 놓았습니다. 혁명에 동참해 주십시오.”



 ▶장 총장=“이번 행동으로 장면 정부에 충분한 경고를 주었으니 출동부대들은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장도영의 주장은 우리 측 장교들을 격앙시켰다. 흥분한 일부 장교는 권총을 빼들었다. “장 총장을 체포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고빗길이다. 궐기의 의지가 무뎌지면 안 된다. 그들이 허튼 수작을 하면 뒤집을 수밖에 없다.



 장도영의 군 수뇌부를 계속 압박해야 했다. 박 소장은 계엄령 선포를 요구했다. 장 총장은 “내 소관이 아니다. 윤보선 대통령과의 면담이 필요하다”고 버텼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다시 일을 저질러야 했다. 새로운 선제적인 공세다. 남산 KBS에 다시 갔다. 이번엔 강찬선 아나운서가 눈에 띄었다. 나는 품속에서 포고문을 꺼냈다. “방송해달라”고 했다. 그 문서는 내가 미리 작성해 둔 것이다.



61년 5·16 ‘군부 행동개시’를 처음으로 알린 남산 KBS 라디오방송국. 그때는 TV 방송이 없었다. [중앙포토]


 오전 9시. 강 아나운서는 포고문 1호부터 4호를 읽어 내려갔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실시하며 일체의 옥내외 집회는 금지한다….”(1호)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오전 7시 장면 정부로부터 모든 정권을 인수했다. 민의원·참의원 및 지방의회를 16일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4호)



 포고문의 명의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장’이었다. 장 총장의 허가는 없었다. 그 일방적인 발표는 상황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라디오와 신문으로 세상을 접하는 시대였다. 국민들은 장 총장이 혁명을 주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혁명군이 이미 세상을 평정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방송 포고문의 위력이다.



 육본의 숨막히던 대치상태는 풀려갔다. 장 총장 측 장군들의 기세는 꺾이고 있었다. 낭패와 주저의 심리가 그들 마음속에 스며들어갔다. 군부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신질서다.



 오전 10시30분 박 소장과 장 총장은 청와대에 들어갔다. 윤보선 대통령은 “나는 계엄을 추인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대통령 입에서 무심코 새어나온 말이 있다. “올 것이 왔구먼.” 그 말은 그 시대의 모든 상황을 압축한다. 그 무렵 민심, 군심 대다수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혼선,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에 국민 8할이 지쳐 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오전 11시 주한 미군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은 “우리는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한다.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는 성명을 냈다. 거사에 중대한 장애물이 등장했다.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주한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 매그루더로서 성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성명이 상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걸음을 내디뎠다.



 매그루더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유혈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장 총장은 흐름에 순응했다. 계엄사령관직을 받아들였다. 오후 4시30분이다. 밤 10시30분 윤 대통령은 대(對)국민방송을 했다. 장면 총리와 장관들에게 빠른 사태수습을 촉구했다. 실권자인 장면 총리는 피신처 수녀원에서 여전히 연락을 끊고 있었다. 디데이의 24시간은 이렇게 종료됐다. 승부는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 기억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완장 제작이다. 그날 저녁 나는 명동 상패가게로 갔다. 하얀 천에 검은 글씨로 ‘혁명군’이라고 쓰게 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4500장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거사병력에게 완장을 나눠줬다. 왼쪽 팔뚝에 완장을 차고는 모두들 좋아했다. 혁명군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넣어주려 한 것이다. 궐기군 사이에 동지애도 솟아났다. 대군에 둘러싸인 소수의 혁명군에겐 이런 심리적 도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혁명군 완장은 사흘 뒤 회수했다. 그때부턴 군부의 통합이 중요했고 다른 부대에 위화감을 주지 않아야 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윤보선(1897~1990년)=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국 에든버러대에 유학했다. 해방 뒤 미군정청에서 농산국 고문을 지냈다. 48년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됐고, 49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집권 민주당은 윤보선 대통령의 구파와 실권자인 장면 총리의 신파로 분열했다. 5·16 때 “올 것이 왔구먼”이란 논란 많은 말을 남겼다. 62년 3월 사임했다. 63년과 67년 박정희 후보와 대선 경쟁을 벌였지만 연거푸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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