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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일반인은 와인 구경도 못한 70년대, 대한민국 1호 소믈리에가 탄생했다

와인 테이스팅 중인 서한정씨. 목에 걸고 있는 은색 목걸이는 그가 1976년 소믈리에가 됐을 때부터 사용하고 있는 와인 시음용 잔(tastevin)이다.


서한정 한국와인협회 초대 회장


87년 수입 자유화 전엔 외국인·고위층만 마셔
"누가 와인 주문하면 도망다녔죠 잘 모르니까"
소믈리에 되고 처자식 잊을 정도로 10년 공부

세계의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은 와인을 예찬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와인을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음료’라고 했다. 국내 1호 소믈리에로 한국와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서한정(72)씨는 와인을 ‘소통의 음료’라고 정의했다. “와인이 외국인을 위한 고가의 면세품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대중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경기도 포천에 귀농해서 땅콩·서리태 등의 농작물을 가꾸고 있다. 가끔 와인 관련 강의도 한다. 기자와 만난 서씨는 2011년산 훌리오 부숑 메를로 리제르바를 꺼내 왔다. “비싼 와인은 아니지만 즐겁게 대화를 나누기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교사 그만 두고 호텔 말단 직원으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뭐든 알아서 하는 둘째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3남 3녀 중 둘째로 전남 여천 (현 여수시)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란 소리 한번 듣지 않고 1962년 순천사범학교를 순탄하게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전남 순천 상사서초등학교에서 교사로 1년간 근무하다 64년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엔 베트남 참전 용사에 대한 대우가 좋았어요. 참전만 하면 어느 학교건 원하면 발령을 내주겠다 할정도였죠. 그런데 외국물을 먹고 와서 그런지 교사가 하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부산으로 가서 무선통신을 배워 해외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어요. 근데 당시 약혼자였던 이 사람이 말렸죠.”

부인 김정수(70)씨는 “당시만 해도 배를 타면 연락도 안 되고 죽는 사람이 많아서 극구 반대했다”며 “배 타면 결혼 안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말했다. 69년 결혼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온 그는 뭐든 나만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보자 생각했다. 이왕이면 외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면 했다. 서울 퇴계로에 위치한 동남관광학원이라는 6개월 코스 호텔학교에 등록하고 1년 만에 충남 아산시에 있는 온양관광호텔 식음료팀에 취직했다.

지방 호텔이었지만 관광지라 외국인 손님이 끊이질않았다. 처음엔 영어가 서툴렀다. 외국인 손님에게 저녁에도 “굿모닝, 써(Good morning, sir)”라고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손에 늘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외국인 손님들에게 질문하고 배웠다. 73년 온양관광호텔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가 서울의 앰배서더 호텔에 바텐더 자리가 있다며 이직 제안을 해서 다시 서울로 왔다. 바텐더를 하면서 칵테일과 와인을 취급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와인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는 매년 전 세계 유명 와인 회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와인 시음과 품평을 하며 이론과 실무를 쌓았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와이너리.


1976년 프라자 호텔 소믈리에가 되다

“88올림픽을 앞두고 87년부터 와인 수입이 자유화됐죠. 와인은 호텔을 자주 이용하는 외국인이나 고위층을 위한 음료였던 거예요.” 마시는 사람도 판매하는 사람도 와인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다. 외국인들은 자신들이 원래 마시던 와인을 지정해서 달라고 했을 뿐 한국 바텐더의 추천은 원하지 않았다. 국내 인사들이 주문하는 와인은 대부분 “같은 걸로” 혹은 “전에 마신 걸로”였다.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와인 주문하는 손님이었어요. 혹시라도 주문을 받을까 도망다니기 바빴죠. 어쩌다 주문을 받게 되면 대충 느낌이 오는 와인을 갖다 드렸어요.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고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치곤 했어요. 실수를 계속 반복할 수 없으니 와인을 공부해야겠다 마음먹게 됐죠.”

한글로 된 와인 서적 한 권 없던 시대였다. 일본에 작은아버지를 통해 일본어로 된 『호텔 레스토랑에 근무하는 사람을 위한 와인의 지식과 서비스』를 구입했다. 그렇게 독학으로 와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소믈리에 1호인 아사다 가츠미였다.

와인을 독학하는 바텐더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프라자(현 더플라자) 호텔에서 76년 국내 최초로 와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소믈리에’라는 직함을 만들고 그를 스카웃했다.

“당시 프라자 호텔은 일본 프린스 호텔에서 운영을 대행했는데 일본엔 이미 소믈리에 문화가 있던 때였죠. 프린스 호텔이 운영을 맡으면서 소믈리에를 국내 최초로 만든거였어요. 그렇게 국내 1호 소믈리에가 됐어요.”
 
1978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 와인 전시회에서 일본 1호 소믈리에인 아사다 가츠미(왼쪽 두번째)와 함께한 한국 1호 소믈리에 서한정씨(왼쪽 세 번째).

 
소믈리에가 되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와인 공부를 시작했다. 서씨와 기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부인 김씨는 화제가 와인 공부에 이르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야속하기만 했어요. 프라자 호텔로 옮긴 순간부터 아침에는 영어·일본어·불어 학원 가고, 낮에는 호텔 근무하고, 저녁에는 집에 와서 와인 관련 서적을 펼쳐놓고 공부를 했어요. 다시 책을 펼치고 공부하던 곳을 찾아 집중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과 공책은 물론, 지우개 가루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죠.?

삼남매가 자라는 동안 서씨는 자녀들이 몇 살인지, 성적은 어떤지 전혀 몰랐다. 지독하게 와인에만 빠져 살았다. 서씨는 “외국인을 상대해야하는데 대화가 안되면 어떻게 하냐”며 “와인 라벨을 최소한 읽을 줄은 알아야 하니 외국어는 필수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매일매일을 와인 공부에 매진했다.
 
“한창 와인 공부를 할 때는 파슬리, 키위, 오렌지 같은 식재료를 코에 대고 다녔어요. 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서였죠. 와인은 꽃향기부터 살코기 냄새, 커피 냄새, 흙 냄새처럼 다양한 냄새를 지니고 있어요. 그 모든 냄새를 명확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늘 다양한 냄새를 경험하고 외웠어요. 냄새를 알면 맛보기 전에 와인의 맛을 대략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맛을 본 후 완벽하게 연결지을 수 있거든요.”
 
그는 와인 관련 서적들은 책이 닳아 해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봤다. 나라별, 기후별, 토양별로 각각인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소믈리에는 단순히 와인을 추천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와인의 역사와 각 지역의 대표 와인, 그리고 대표 와인이 된 이유 등 와인 속에 숨은 이야기들까지 전부 알고 있어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독일은 일조량이 적기 때문에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이 더 맛이 풍부하죠. 이런 걸 알기 위해 독일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다양한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적인 공부는 하지 않고 몇몇 와인 브랜드나 지역 정도만 알고 전부를 아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합니다.”
  
사마란치, 앤 공주 등 귀빈 만찬의 와인 해설가

84년 신라호텔이 국내 유일의 소믈리에였던 서씨를 스카웃했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와인 대중화가 서서히 시작됐다. 90년대 들어 와인 붐이 일었다. 소믈리에가 추천해 주는 와인을 그냥 마시기만 하던 사람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구분하고 각 나라별 와인의 차이를 묻고, 와인 예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이전엔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체 최고경영자(CEO) 정도나 와인에 관심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와인을 공부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한때 비싼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며 무조건 비싼 와인만 마시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와인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리 비싼 와인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며 “와인을 추천할 때는 어떤 종류의 와인을 좋아하는지 질문하고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와인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명사들도 많다. 고 박정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 국내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 영국 앤 공주, 배우 앤서니 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등도 그의 서비스를 받았다. 98년 방한한 앤서니 퀸이 고른 와인은 비싸지 않은 무통 카데였다고 한다.
 
국내 굴지의 기업체 인사들도 손님 접대 때면 그를 찾았다. 분위기에 맞는 와인을 고르고 와인에 대한 역사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씨의 몫이었다. 대기업 경영진이나 정부 고위층 인사들이 와인을 선물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의 전화벨은 울렸다. 김씨는 “남편이 비번인 날에도 전화가 왔다”며 “자료를 찾아서라도 와인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고 했다.
 
“‘선물 받은 와인이 있는데 이 와인은 어떤 와인이냐, 외국에서 사온 와인이 있는데 잘 사온거냐, 어떤 분께 선물하고 싶은데 그분의 취향에 맞겠느냐’ 그런 질문이 많았죠. 와인은 좋은 선물임과 동시에 까다롭고 어려운 선물이거든요. 상대의 수준을 알고 선물해야 실례가 되지 않으니까요.”
 
한번은 삼성에서 전화가 왔다. 이건희 회장의 생일을 맞아 회사에서 기념 와인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 회장의 생년에 맞춰 1942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를 구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씨가 와인 병을 보니 와인이 손가락 두 마디쯤 비어있었다. 관리가 잘못돼 코르크 사이로 와인이 산화된 것이었다.
 
“이 와인을 드리면 절대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시음을 했더니 역시나 맛이 변질돼 있더라고요. 결국에는 스페인산 와인으로 교체가 됐어요. 좋은 의도로 선물을 준비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게 와인 선물이에요.”

한국 최초로 프랑스 농업공로훈장 받아
 
서한정씨가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농업공로훈장.


외환위기(IMF) 전까지 와인 업계는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잠시 주춤했던 와인은 2000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커졌다. 와인 전문 웹 사이트와 온라인 동호회는 성장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들은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와인을 소개했고 다양한 와인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서씨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와인 마시는 방법, 와인의 역사, 와인 문화 등을 전파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90년에 한국소믈리에협회를 설립하고 2001년까지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90년대는 와인이 인기를 얻은 시기였고, 2000년대는 와인 문화가 자리 잡은 때였어요. 이때 와인전문가 과정도 생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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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SBS ‘떼루아’라는 와인 드라마의 자문 역할을 맡아 6주간 배우들을 직접 교육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노력을 알아본 것은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였다. 200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농업공로훈장’을 받았다. 농업공로훈장은 1883년 나폴레옹 1세가 제정한 것으로 ‘10년 이상 한 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프랑스 와인 판매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사람’을 선정해 수여하는 훈장이다.

국내엔 프랑스·미국·일본처럼 국가 공인 소믈리에 자격증은 없다. 호텔, 레스토랑, 와인바에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소믈리에로 불리곤 한다. 한국소믈리에협회에 등록된 소믈리에 수는 500명 정도. 서씨는 2008년 신라호텔에서 퇴직하고 3년간 촉탁직으로 근무한 뒤 2012년부터 포천에서 살고 있다.


"와인 잘 마시려면 너무 아는 체 하지 마세요
상대방이 할 말이 없잖아요 대화를 나누세요
봄엔 화이트, 여름엔 레드, 가을엔 로제 와인을"


 
그에게 와인을 어떻게 마셔야할지 물었다. 그는 흔히 알려진 시시콜콜한 와인 상식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와인에 대해 너무 아는 체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와인은 상대가 있고, 그 상대와 이야기를 하면서 마시는 음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님하고 식탁에서 대화를 하는데 나만 아는 척을 하면 상대방은 할 말이 없죠. 너무 아는 척하지 말고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중요합니다. 나도 백화점 와인숍에서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아요. 권하면 마셔보고 ‘맛있네요’라고 한마디 하면 끝입니다. 상대에 맞게 와인을 즐기며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이 와인 마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와인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봄에는 산미가 가벼운 화이트 와인으로 상큼하게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고, 여름 장마에는 깊은 향의 레드 와인을, 가을 단풍이 떨어질 때 애인과 마시기 좋은 와인은 로제 와인이겠죠”라고 말했다.

“와인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료입니다. 품질과 가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혹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했다는 그는 서재에 자리잡은 와인 서적들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아직까지 마땅한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며 아쉬워 했다.

그의 책은 그냥 단순히 와인에 대한 역사와 정보만을 담은 책이 아니었다. 그의 경험이 적혀 있고 그가 지나온 과거가 밑줄쳐져 있었다. 부인 김씨는 “남편의 근성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적임자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며 남편의 40년 소믈리에 역사가 담긴 자료과 사진들을 어루만졌다.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는 조심하라”
-칼 마르크스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빅토르 위고

“와인을 맛볼 줄 아는 사람은,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와인의 비밀을 맛보는 사람이다”
-살바도르 달리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음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포천=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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