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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

   
 
애국심을 함양하는 달, 3월도 거의 끝나간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만세운동을 벌리자 일본의 군대와 경찰은 총검으로 우리국민들을 탄압해 유관순과 많은 애국자들이 순국했다. 집회에 참여한 우리국민은 210만명이나 되며 사망자가 7천500명이나 되고 부상자는 1만6천000명이며 피검자는 4만7천명에 달한다.

흔히 3·1운동은 개화기 이래 조선의 3대 민족주의 운동인 ‘위정척사운동’, 독립협회의 ‘개화·계몽운동’, 동학의 ‘천도교운동’이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어 표출된 거족적 민족독립운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지도자들은 하나 된 우리민족의 힘을 확인하게 되었고 국력과 문명의 차이에서 도래한 국권상실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시도해 나갈 수 있었다. 교육·계몽운동과 이에 기초한 실력양성추구, 납세거부운동, 물산장려운동, 국산품애용운동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3·1운동은 도래하는 신 국제 질서의 흐름에 발맞추어 공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정치사상적으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절대왕정체제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고 이에 발맞추어 조선왕조를 이은 대한제국의 임시정부도 ‘민국’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곳곳에서 형성되었던 공화정 형태의 국· 내외 임시정부들, 그리고 이들을 최종적으로 통합한 상해 임시정부의 출현은 3·1운동이 한민족의 문명사와 정치사상 발전사에 큰 획을 그었던 역사의 분기점이었다고 명명할 수 있게 한다.

또 독립선언서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3·1운동은 자유, 평등, 정의, 인도, 평화 등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비폭력저항으로서 중국의 5·4운동,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자주운동, 이집트와 터키의 독립운동 등 피압박 민족 해방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요즘 우리 국민들의 자부심을 높여주고 있는 ‘한류’의 원조였던 셈이다. 식민지 치하인 상황에서, 게다가 문화·예술의 편린이 아닌 사상적·철학적 한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참으로 지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3·1운동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년여의 기간 동안 당시 전 국민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인구가 참여한 거대한 민족운동이 되었다.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한 조선인이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라는 것도 일본 측이 시위 주동자를 색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작성한 통계자료이고 보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으로 살생명부나 다름없는 독립선언서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기입하고 민중을 이끌었던 손병희를 비롯한 33인의 민족 지도자들. 또 무자비한 일제의 총칼 앞에 굽히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쓰러져 간 우리의 조상들. 이모든 분들의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과 민족애 앞에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덕분에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독립 운동가를 주변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결과 해방 이후 현재까지 독립운동가 자손들 중 상당수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힘겹게 가난과 싸우며 사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아직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미 발굴 독립유공자들도 존재하고 있지만 유가족 스스로가 조상의 독립운동을 증명해야만 하는 비합리적 행정절차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6·25 동란 및 우리의 허술한 문서보관 관례로 인해 찾을 수 있는 증거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감시와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던 유가족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가보훈처가 최근 광복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선양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일부 개정을 추진하여 유관순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분들의 체계적 관리는 물론 후손들에게만 맡겨만 놓고 뒷짐만지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미 발굴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료발굴에 앞장선다고 하니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현장이나 형무소에서 사망한 모든 독립운동가의 명예회복과 그 유가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후손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고취시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와 도리가 아니겠는가.

유영옥 국가보훈안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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