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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살인 시효 폐지, 다 동의하지만 …

이규연
논설위원
16년 전 일입니다. 대구에 사는 김태완군이 골목길에서 괴한이 뿌린 고농도 황산을 얼굴과 몸에 뒤집어쓰는 극악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태완이는 49일간 투병하다가 숨졌고 범인은 안갯속에 숨어버렸습니다. 지난해 이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구법 15년)가 다가오면서 시효를 없애자는 여론이 형성됐습니다. 결국 법안이 만들어졌습니다. 해피 엔딩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태완군의 어머니는 온라인에서 살인 시효 폐지를 청원하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정책은 많은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한 공적 해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책을 만들거나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공직자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꼭 풀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고, 바람직한 해법이 존재하는데도 ‘정책의 창’이 열리지 않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살인 시효 폐지가 그렇습니다.



 공소시효 존치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범죄자가 형벌에 상응하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거나 범행으로 인해 파괴된 법 질서가 회복했다는 다소 사변적인 이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진실을 밝혀줄 증거가 사라지거나 훼손된다는 범죄수사적 근거입니다. 하지만 범죄자의 정신적 고통보다는 범죄 피해자나 유족이 받는 고통의 시간과 깊이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DNA 분석 등으로 오래 전 증거물도 탐지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범죄수사적 근거도 흔들립니다.



 화성 연쇄살인과 이형호군 유괴살인, 개구리소년 사건의 공소시효가 마무리되고 오원춘 살인, 제주 올레길 살인 등 흉악범죄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살인 시효 폐지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만들어졌습니다. 90%에 가까운 시민이 이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반대하는 전문가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법무부는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9월 폐지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넘겼습니다. 국회에서도 2012년 이후 강기윤·박인숙·서영교·정희수 의원 대표발의 등으로 무려 7~8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다 동의하는데도 살인 공소시효는 건재합니다. 황당함을 정책형성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공직자는 많은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법이 제시되면 이를 받아들여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합리이론’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직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결정적 계기와 정치적 흐름이 있어야만 정책을 채택합니다. 이를 ‘창 이론’이라고 하더군요. 공직사회에 ‘마이동풍 DNA’가 존재하는 겁니다.



 살인 시효가 쌩쌩하게 살아 있는 것은 ‘창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정부는 법안을 만들었지만 입법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어젠다’로 밀어놓은 측면이 강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제각각 법안을 내놓았지만 정작 국회 차원에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열광할 만한 결정적 계기나 강력한 정치적 흐름이 없다 보니 다수가 폐지에 동의해도 시효는 남아 있게 된 겁니다.



  문민정부 이후 공소시효가 폐지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단죄할 때 내란죄 등의 공소시효가 폐지됐습니다. 2011년에는 장애인과 미성년자 강간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어졌습니다. 전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권력이 작용했고, 후자는 소설·영화 ‘도가니’가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태완군 어머니의 눈물은 누가, 어떻게 닦아줘야 할까요? ‘대박’ 영화를 만들까요? 대통령이 진두지휘해야 할까요? 국회·정부가 알아서 잘 처리하면 안 되나요? 오늘도 어머니는 글을 올렸습니다. ‘아이의 죽음이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겨집니다. 도와주십시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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