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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사자머리 원조, 미스코리아 120명의 '원장님'

하종순 회장은 지금도 마샬미용실(현 마샬뷰티살롱 명동본점)에 매일 출근한다. 사진=김경록 기자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미스코리아 당선자들이 하나같이 하던 그 말. 그 ‘원장님’은 바로 ‘마샬미용실’의 하종순(78) 회장이었다. 그는 김성희·서정민·이영현·궁선영 등 15명의 미스코리아 진(眞)을 비롯 선(善)으로 뽑힌 고현정·염정아 등 120명의미스코리아를 만들었다. 1980~90년대 프랜차이즈 미용실로 성공한 박승철·박준 대표와 자끄데상쥬 김진수 대표, 미스코리아 대회의 경쟁 구도를 이뤘던 세리미용실(지금은 ‘더세리뷰티살롱’) 이훈숙 대표도 모두 하 회장의 ‘마샬 명동점’ 출신이다. 3년 임기의 대한미용사회중앙회장을 3번 연임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미·이용협회 부회장을 지낸 ‘한국 미용업계의 대모’로 불리는 사람. 하종순 회장을 마샬미용실 명동 본점에서 만났다.

21세 때였다. 하 회장은 58년 처음 미용실에 발을 들였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 단성사 극장 근처에 있는 이모의 가게였다. 3남 1녀의 외동딸로 귀하게만 자란 하 회장은 성신여고를 졸업하고 종로에 있는 이모의 미용실에 취업했다. 디자이너 4명에 잔일하는 직원이 2~3명 정도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미용실이었다. 그곳에서 하 회장은 카운터를 맡았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카락을 말고 만지는 걸 좋아했어요.” 여고 시절 친구들이 출입금지였던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성인처럼 머리를 해달라고 하면 ‘구르프’라 부르던 헤어롤만으로도 머리를 멋지게 만들어줬었다.

카운터를 맡았던 그는 미용실을 거의 혼자서 운영했다. 미용실에 관심이 없었던 이모가 가게에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용사들은 어린 하 회장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툭하면 결근을 했다.

미용사가 없으면 하 회장이 대신 손님 머리를 했다. 롯드(파마를 하기 위해 머리를 마는 롤)에 은박지를 씌우고 연탄불에 달군 집게를 집어 파마를 했다. 집게를 너무 오래 집어놔 손님 머리를 태워 낭패도 많이 당했다. “겁도 없이 했어. 당시엔 들어온 손님을 내보낼 수 없어서 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 손님 머리로 연습한 셈이지. 그러다 망했지.” 이모네 미용실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내 인생의 롤모델, 오엽주
 
한국 1호 미용사로 기록되고 있는 고 오엽주씨. 일본에서 배워와 1933년부터 미용실을 운영했다.
이모의 미용실에 있던 미용사들은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있던 미용실로 옮겼다. 하 회장은 함께 있던 미용사들을 만나기 위해 미용실에 놀러 갔다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 바로 한국인 최초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미용 기술을 익혀온 오엽주(1904~1987) 선생이었다.

“그때 오엽주 선생의 모습이 너무너무 멋있었어. 실력도 있지만 스타일도 멋있었어. 신문사에서 와서 인터뷰도 자주 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던지. 그런 미용인은 앞으로도 태어날 수 없을 거야. 그때 오 선생을 보면서 ‘참 멋있으시다. 나도 저걸 배워서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

오 선생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인생의 롤모델이다. “처음 놀러간 날, 오 선생이 날 보더니 가게에 나오라고 하는거야. 다른 디자이너들에게서 들었다며 ‘와서 좀 도와달라’고 하시는데 신이 나서 다음 날 바로 출근했어.”

그는 ‘엽주미용실’에서 카운터를 보면서 미용사 보조를 했다. 미용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카운터에서 계산하면서 지켜보니까 디자이너들이 돈을 참 잘 벌어. 하고 싶더라고. 나도 손재주는 있었거든. 인턴 생활을 정식으로는 안 했지만 배우는 게 재미있어서 빨리 배웠어. 이모네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해본 경험도 있었고.”

2년이 채 못 돼 디자이너가 됐다. 막내 디자이너였지만 감각이 좋았던 그는 금세 인기 디자이너가 됐다. 그를 찾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오엽주 선생도 하 회장을 귀여워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시기가 많았다. 디자이너 2년차가 되자 주변 미용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랐다. 하지만 오 선생과 함께 있는 게 좋아서 옮길 생각은 없었다. 쉬는 날 없이 일하는 것 말고는 힘든 게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하 회장을 자주 만날 수 없는 게 불만이었다. 백화점에 있는 미용실은 주말이 더 바빠 3개월에 한 번꼴로 만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남자친구가 자신의 외삼촌이 수원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함께 가고 싶었던 하 회장은 위경련이 일어났다고 거짓말하고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그날 하필이면 오 선생님이 수원에 오셨던 거야. 남자친구랑 팔짱 끼고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 셔틀버스 안에 선글라스를 낀 오 선생님이 딱 앉아있는 거 있지.” 다음 날 하 회장은 오 선생의 연구실로 불려가 한참 혼이 났다. “좀 심하셨어. 마음에 상처가 되더라고. 그래서 난 지금도 애들 연애하는 거 가지고는 말 안 해.”

마침 3년 단골 손님의 소개로 당시 충무로에 있던 ‘사다미용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사다미용실은 당시 톱 스타였던 김지미를 비롯해 연예인들이 다니던 미용실이었다. 당시엔 명동이 아닌 충무로가 미용의 중심이었다. “물론 오 선생님과 비교할 순 없었어. 그분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좋았지. 하지만 주말에 쉬고 싶은 마음이 컸어. 혼난 것이 분하기도 했고.” 그렇게 사다미용실로 옮겼다.

명동 미용실 시대를 연 마샬의 시작

결혼 직후 시댁의 반대로 일을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었다. 남편은 미용실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웠던 친정을 돕기 위해 하 회장은 몰래 일을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하면 한복을 싸들고 가게에 나갔어. 퇴근하기 전에 집에 전화해보고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이 집에 있으면 ‘친구 만나고 왔다’며 한복 입고 들어왔지. 당시엔 외출할 때 한복을 많이 입었거든.”

그러다 건물주와 업주의 마찰로 사다미용실이 없어졌다. 디자이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 회장도 본의 아니게 일을 그만두게 됐다. 첫째 아이를 낳고 집에서 쉬던 하 회장이 다시 일을 시작한 건 친구 때문이었다. 미용실을 하겠다며 돈을 빌려간 친구가 ‘장사 안된다’며 미용실을 그만둬 버린 것이다.

미용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 미용실은 지금의 마샬 명동점 근처였다. 하 회장이 맡고 나서 건물주가 한 달 임대료를 3만5000원에서 7만원으로 올렸다. 그래도 했다. 그후 건물주는 3개월간 임대료를 안 받아가더니 소송을 걸어 하 회장을 쫓아냈다.

오기가 났다. 그러다 지금의 마샬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하다 망한 미용실이었다. 권리금 80만원을 주고 미용실을 시작했다. 이름은 하 회장이 잘 다루던 고데기 ‘마샬’에서 따왔다. 당시엔 가게 주인의 이름이나 가위를 간판으로 내걸던 시절이어서 마샬이란 이름은 생소했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이 하긴 싫었다. 1962년. 25세의 나이에 그렇게 마샬의 역사가 시작됐다.
 

“미스코리아 되려면 하 원장 찾아라”
 
하 회장이 87년 미스코리아 선 최연희에게 메이크업을 해주고 있다.
70~80년대 명동 미용실은 미스코리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었다. 요즘 ‘어떤 연예인이 다닌다’는 미용실이 유명세를 타는 것처럼 당시에는 ‘미스코리아 누구를 배출했다’는 게 미용실 위상을 결정했다. 60년대 중반에는 종로 ‘YMCA미용실’과 ‘세븐미용실’에서 미스코리아를 많이 배출했다. 명동에 ‘윤희미용실’이 있었지만 배출한 미스코리아가 많지 않았다. 70년 이후에는 마샬을 비롯한 세리미용실 등 명동 미용실들이 미스코리아 사관학교 역할을 했다.

하 회장은 68년부터 진(眞) 김윤정부터 시작해 93년 궁선영까지 25년 동안 120명의 미스코리아를 배출했다. ‘미스코리아가 되려면 마샬미용실의 하종순 원장을 찾아라’란 말이 돌 정도였다.

전략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김지미·고은아·김자옥·김창숙·강부자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다 마샬을 이미 다니고 있던 터라 이름을 알려야 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68년 진으로 뽑힌 김윤정이 찾아와 “미스코리아에 나가려고 한다”고 해 별 신경 안쓰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준 게 전부였다. 2년 뒤인 70년도 진 이정희까지 하 회장의 손에서 탄생하면서 마샬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주최사인 한국일보사 측에서도 해외 대회에 샤프롱(젊은 여자가 사교장에 나갈 때 따라가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 하 회장이 가주길 바랐다.

5공 땐 영부인 이순자 머리 손질 맡아
지금도 명동점에 매일 아침 출근
54년째 같은 자리 "지금이 제일 행복"

73년 안순영이 참가한 런던에서 열린 미스월드 대회에 처음 샤프롱으로 갔다. 영어를 전혀 못했는데도 겁이 안 났다. 상은 못 탔다. 처음부터 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당시 해외 나가기 힘들고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0일간의 합숙 기간 동안 중요 행사를 빼놓고는 런던의 비달 사순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연수를 받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때를 시작으로 하 회장은 미스코리아 해외 대회 때마다 샤프롱을 자청하며 선진국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배웠다.

자연히 마샬은 다른 미용실보다 앞서 나갔다. 그가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면 다른 미용실에서 그대로 따라했다. “신경 안 썼어. 난 또 다른 걸로 한발 앞서갔으니까.” 그러다 미스코리아의 상징물처럼 여겨진 부풀린 사자머리를 만들어냈다. “세계대회에 가보니 다들 머리를 우아하게 부풀리고 있더라고.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업스타일을 많이 했었어. 그런데 머리를 부풀리고 왕관을 씌우니까 얼굴이 작고 우아해 보였어. 여왕처럼.”

식사하며 결혼식하는 호텔식 예식장 시작
 
90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해 열렸던 여성 대상 이벤트 `신부교실`의 웨딩드레스쇼가 끝난 후의 모습. 당시 미스코리아였던 오현경, 고현정, 서정민과 함께 했다.
늘 새로운 시도를 했다. 5공화국 시절 청와대에 들어가 당시 영부인이던 이순자 여사의 머리 손질을 맡았을 땐 영부인들의 전형적인 머리인 업스타일을 단발로 바꿨다. “그전부터 마샬의 고객이셨어. 청와대 들어가시고 몇 년 후 날 부르셨지. 처음엔 업스타일로 머리를 하셨는데 내가 들어가서 머리 짧게 잘라 드렸어.”

70년대 초반엔 신흥 부촌으로 부상한 반포동 주공아파트 상가에 지점을 몇 개 냈다. 해외에서 돌아오면 ‘미스코리아 월드 대회 다녀왔습니다’ ‘해외 연수 다녀왔습니다’란 내용으로 광고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손님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당시는 미용인들이 해외에 잘 나가지 못했고 나가서 연수까지 받아 신기술을 익혀온 거라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반포엔 지점을 9개까지 냈다. 그 뒤엔 분당에 지점을 냈다.

“처음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으로 가려다 반포로 넘어갔어. 좀 산다하는 사람들이 거기로 많이 갔는데 명동까지 안 나오더라고. 다른 유명 미용실들도 동부이촌동으로 간다해서 가봤는데 이미 미용실이 너무 많았어. ‘아, 여긴 아니구나’ 했지. 지나가다가 우연히 반포동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고 ‘여기다’ 싶었어. 그 당시 부유한 고객들이 그렇게 움직였거든. 강북에서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으로, 그 다음 반포 주공아파트로. 그 다음이 분당이고.”

91년엔 강남 논현동에 ‘강남 프라자 웨딩홀’을 지었다. 자신이 곱게 치장해 놓은 신부가 북적거리는 예식장에서 초읽기로 예식을 하는 게 늘 불만이었다. “아예 내가 웨딩홀을 해버리자고 마음먹었어. 당시 예식장은 도떼기시장 같았거든. 천장도 낮아서 답답했고. 고급 신부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웨딩홀을 기획했지.”

논현동에 웨딩홀을 짓고 예식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지금의 호텔식 예식을 했다. 당시엔 호텔에서 예식을 못했다. 정부에서 호화사치 결혼식을 막는다며 호텔 결혼식을 금지했다. 규제는 98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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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떠난 딸과의 여행
 
올해 초 딸 김주승씨와 함께 떠난 파리 여행. 딸 과 처음으로 함께한 해외 여행이었다.
하 회장은 마샬 명동점을 처음 개점한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54년째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매일 아침 미용실에 나간다. 마샬은 명동 외에도 동부이촌동, 분당, 여의도, 이대, 일산, 동탄에 14개의 지점이 있다. 모두 가족과 제자들이 맡아서 직영으로 운영한다. “체인점 하면 다니던 고객들이 싫어해. 반포에 첫 지점을 냈을 때도 나한테 한 고객이 ‘여기도 마샬 이름만 빌려서 하는거 아니야? 그 원장님은 생존해 계시나’ 하는 거야. ‘제가 바로 그 원장인데요’ 하니까 그제서야 웃으면서 자기가 명동 마샬 다녔다고 하더라고.”

80~90년대 마샬 출신의 박승철, 박준 대표가 수십 개의 체인점으로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하 회장은 직영점을 고집했다. “난 손님 머리를 서툴게 만지는 걸 제일 싫어해. 체인점은 아무래도 숙련된 디자이너가 있기 힘든 구조야. 레스토랑은 주방장이 한 명이면 되는데 미용실은 디자이너가 모두 주방장급이여야 하거든. 지점이 10개 넘어갔을 때부터 느꼈지. 좋은 디자이너를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제는 체인점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싫어.”

하 회장은 올해 초 처음으로 딸과 프랑스 파리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대학에 입학한 외손녀 둘의 배낭여행 일정에 맞춘 것이다. 그동안 미스코리아들을 데리고, 또 협회장의 자격으로 숱하게 해외에 다녔지만 한 번도 딸과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손주들이 다 잘 자라줬어. 대학도 잘 가고 내로라하는 회사에도 떡하니 입사했어.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바로 지금이야. 내가 내 자식들에게만 헌신했으면 애들이 더 잘됐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들 원만하게 잘 자라주고 자기 자식들을 잘 키워낸 걸 보니 그동안 한국 미용을 발전시키겠다고 애쓴 게 우리 손자손녀들에게 돌아온 게 아닌가 하면서 감사하고 있어.”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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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