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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쓰는 2030, 만년필에서 개성을 찾다

모바일 메신저 라인과 라미가 협업한 ‘라인·라미 스페셜 에디션’(위).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에서 활동 중인 아이디 ‘리리티헤난’이 만년필로 써서 자신의 SNS에 올린 손글씨(아래). 왼쪽 상단 만년필은 위부터 라미 ‘2000’, 라미 ‘사파리’, 워터맨 ‘뉴 헤미스피어’.

직장인 이은선(23·여·서울 서초구)씨는 요즘 만년필에 푹 빠져 있다. 파란색·분홍색·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의 잉크를 구비해놓고 기분에 따라 색깔을 바꿔가며 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나 멋진 구절들을 종이에 써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린다. 그는 잉크 색깔 수만큼의 만년필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잉크가 섞이면 색이 탁해지기 때문에 잉크별로 만년필을 달리 해야하기 때문이다. “손글씨를 가장 예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만년필인 것 같다”며 “만년필을 아저씨들이나 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예쁜 디자인과 컬러의 만년필이 많아서
좋다”고 말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만년필연구소에 만년필 매니어들이 줄을 서있다. 만년필 무료 수리를 기다리는 거다. 오픈 한 시간 전부터 줄이 시작됐다. 사진=김경록 기자
 젊은층 사이에 만년필 인기가 높다. 아날로그 손글씨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면서다. 고가의 중후한 펜이라는 이미지를 깬 저렴하고 화려한 색상의 만년필이 늘어난 것도 이유다. 교보문고는 최근 만년필 매장을 대폭 확대했다. 입점 브랜드를 10개에서 15개 브랜드로 늘리고, 만년필 판매 코너를 따로 설치했다. 권기원 교보문고 영업기획팀 부장은 “합리적인 가격과 예쁜 디자인을 갖춘 신세대형 만년필들이 나오면서 10~20대 젊은 고객들의 수요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최근 몇 년간 이어지고 있는 손글씨의 인기가 만년필에 대한 선호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에서도 이달 만년필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 이상 증가했다. 옥션 관계자는 “손으로 하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의 인기가 커지면서 섬세한 글쓰기가 가능한 만년필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최근 젊은층 사이에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만년필 브랜드는 ‘라미 사파리’다. 지난해 라미 사파리의 판매량은 전년 대비 44% 성장했고 올해는 5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4만~5만원대의 가격에 파스텔 블루나 라임색 같은 다양한 컬러의 제품이 나와 젊은 여성들이 선호한다. 라미 사파리의 인기는 4~5년 전부터 시작됐다. 2013년 한정판 제품인 네온옐로와 2014년의 네온코랄은 초기 출시 물량이 출시 즉시 완판돼 독일 본사로 급하게 추가 주문을 했다. 올해는 네온라임 색깔의 만년필을 선보일 예정인데 이를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허장미 라미마케팅 과장은 “만년필을 단순한 필기 도구가 아닌 패션 아이템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모바일 메신저 ‘라인’은 지난 6일 라미 사파리 콜라보네이션 한정판 만년필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남지웅 라인 홍보팀 과장은 “테스트용으로 준비한 100개가 1시간 만에 다 팔렸고, 현재 3차 준비 물량까지 품절 행진 중”이라고 말했다.

 파커·워터맨 등 고가 만년필이 중심이던 브랜드에서도 젊은층을 겨냥한 제품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파커에서 나온 10만원대 모델인 ‘어번’과 ‘아이엠’은 올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이상 늘었다. 보라색·분홍색 등 화려한 색상의 제품이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다. 워터맨에서 나온 10만원대 ‘뉴 헤미스피어’도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슬림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① 평평한 모양의 플랫형 ‘워터맨 58’(위), 둥근 유선형 만년필 ‘파커 51’(아래). ② 굵은 만년필 촉 B닙 ‘파일롯 743’(왼쪽), 가는 촉 FM닙 ‘커스텀 743’(오른쪽). ③ 연성 펜 ‘링컨’(위)으로 그린 그림, 경성 펜 ‘워커맨 에드슨’(아래)으로 그린 그림.

만년필, 2030 소통의 도구로

지난달 11일 저녁 7시, 서울 을지로의 한 카페에서는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의 초심자를 위한 정기모임이 열렸다. 이제 막 만년필의 세계에 발을 디딘 신입 회원과 기존 회원 3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어색한 인사치레 없이 자신이 가져온 잉크나 만년필을 서로에게 소개하며 모임을 시작했다. 만년필에 잉크 넣는 법, 자신만의 만년필 사용법, 만년필의 역사 등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난생 처음 동호회에 가입했다는 이은영(24·서울시 관악구)씨는 “SNS에 만년필로 쓴 내 손글씨를 올리고 있다”며 “명언이나 드라마 대사 같은 좋은 문구들을 이미지에 맞는 색깔의 손글씨로 써서 올리면 호응이 크고 관련 문의도 이어져 마치 전문가가 된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나왔다는 김선호(19·고양 일산구)군은 “학생이기 때문에 필사를 하거나 논술을 쓸 일이 많은데 그때 만년필을 사용하면 한 글자씩 집중해서 쓰게 돼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말했다. 클래식 만년필 애호가인 그는 만년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브랜드 고유의 전통과 가치가 좋다고 했다. 김군이 이제까지 수집한 만년필은 총 50여 개. 공부할 때도 하루 한 페이지 이상은 만년필로 쓴단다. 박종진 펜후드 회장은 최근의 만년필 붐에 대해 “2030 세대들이 소통의 도구로 만년필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전통적으로 만년필은 소통의 도구였다고 했다. “과거에는 손글씨 편지를 통해 나의 안부를 알렸다면 현재는 손글씨를 쓰고 찍어서 SNS에 올리며 나의 지금을 알리고 있는 셈”이라고 해석했다.

 펜후드 회원들의 연령대는 10~40대로 다양하지만 최근 들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들은 20대 여성이다. 오은영(29·서울 강남구)씨는 “만년필마다 굵기나 부드러움이 다르다. 글씨의 느낌도 다르고 잉크의 컬러에 따라 같은 글씨라도 분위기가 바뀌는 게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의 회원 수도 최근 급격히 늘었다. 2011년 1만3500여 명이던 회원 수는 지난해 1만9900여 명으로 늘었고, 올 들어 2만4400여 명이 됐다. 여성 회원들이 대폭 늘어난 것도 달라진 점이다. 특히 젊은 여성 회원이 크게 늘었는데 최근 6개월간 20대 여성 회원만 306명이 새로 가입했다. 원래 남성 회원의 비율이 훨씬 높은 펜후드인데 올해 들어온 20대 신입 회원만 놓고 본다면 여성 회원의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
 
내게 꼭 맞는 제품 고르는 법

명품 만년필이 좋다고 하지만 진짜 좋은 만년필은 ‘내게 맞는 만년필’이라는 게 만년필 매니어들의 말이다. 만년필의 외관은 크게 타원형과 평평한 플랫형으로 나뉜다. 펜촉의 강도로 본다면 펜촉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연성과 단단한 경성으로, 뚜껑의 형태로 본다면 뚜껑을 돌려서 따는 스크루 방식과 잡아 빼는 슬립온 방식으로 나뉜다. 빠르게 쓰거나 긴 글을 쓰는 사람에겐 펜촉이 단단해서 받아쓰기 좋고 잉크가 빠르게 마르는 경성 펜촉을 쓰는 게 좋다. 사인할 때 쓴다거나 짧은 글쓰기 위주라면 부드럽고 잉크가 천천히 마르는 연성 펜촉의 만년필이 적당하다. 만년필 매니어 이은규(33.서울 송파구)씨는 “고가의 만년필이 반드시 좋은 만년필일 수 없고 저가의 만년필이라고 저품질의 만년필도 아니다”며 “나의 평소 글쓰는 습관, 펜을 쥐는 형태, 필기감 등에 따라 저가의 만년필이라도 내게 맞는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이다”고 말했다.

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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