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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FDA서 일할 때도 새벽마다 한국어 소설 썼죠

박숙자씨는 학창시절 “밥벌이 할 수 있는 과를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문과 대신 이과를 갔지만 작가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진 박숙자]
매일 아침 4시간씩 컴퓨터 앞에서 끙끙 앓는다. 문장이 안 나올 때는 두 줄밖에 못 쓸 때도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칠순의 재미교포 작가 박숙자씨
항공우주학자 황보한 박사가 남편
한국 돌아와 무궁화 위성에 기여
남편 대신 생계 … 은퇴 후 꿈 이뤄

하지만 한국어로 쓰는 문학은 그에게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75세라는 나이, 한국을 떠난 지 46년이나 지났다는 건 걸림돌이 못 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독성학자(Toxicologist) 출신 재미교포 작가 박숙자(75)씨 이야기다.



박씨는 29세 때인 1969년 미국에 갔다. 남편이 미국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지 회사에 취직하면서였다. 박씨도 미국에서 독성학을 공부해 FDA에서 안전성 심사를 하는 독성학자가 됐다.



그는 FDA 등에서 32년간 일하면서도 새벽이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인 글쓰기에 몰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너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뒤 품어온 작가의 꿈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고국의 항공 우주 산업 개척을 위해 한국에 12년간 머무르면서 전업작가의 꿈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미 유명 우주항공사 등에서 일하다 89년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귀국, 무궁화 위성 1, 2, 3호 발사에 기여한 황보한(77) 박사가 그의 남편이다. 박씨는 그 동안 미국에서 세 아이를 데리고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야 했다. 당시 한국 경제가 좋지 않아 남편의 보수가 많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남편은 한국에서 돌아왔고, 박씨 또한 2006년 은퇴하면서 드디어 작가의 꿈을 이뤘다. 그는 지난 8년여간 한글로 단편소설 12편, 장편소설 1편을 썼다. 한인 여성의 자아 찾기, 일제 강점기 이야기 등이 소재다. 장편소설 ‘하멜의 아이들’은 17세기 한국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이야기에서 착안해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방인을 그렸다. 그가 바로 미국에 사는 이방인으로서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썼다. 그 동안 '미 중앙일보'·『뉴욕문학』·『워싱턴문학』신인문학상, 『동서문학』가작을 받았고, 최근엔『창조문예』신인작품상까지 받아 2월호에 작품이 실렸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기니 한국어 감각이 떨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한국 신문을 읽고, 한국 문학 작품을 구해 읽는다. 그는 “요즘 한국 작품에서 외래어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며 “한글로 글을 쓰면서 우리 말의 순화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가 박경리씨를 존경한다.



발전한 한국을 보면 미국 가난한 동네에 살던 시절 이웃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우주공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당시 박씨는 우물쭈물하다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남편이 여러 분과 함께 일해 무궁화 위성을 발사했을 때 그 이웃을 찾아가 시원하게 답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요즘 남편은 박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박씨는 “남편이 이번엔 아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차례라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황보 박사도 『별들의 만남』이란 소설책을 2000년 한국서 낸 적이 있다. 황보 박사의 근황을 물었으나 “은퇴 후 한국에 기술자문을 하며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정도로만 해달라”는 전언이 돌아왔다.



박씨는 오늘도 글쓰기와 씨름한다. 그는 “한국과 미국 문화의 중간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과 한국인을 다룬 작품을 영어로도 써서 영어권에 한국을 더 알리고 싶다는 뜻이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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