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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제대로 읽는 재팬] 아베노믹스 황금콤비의 균열 …일본 경제 '부러진 화살' 위기

아베노믹스를 2인3각 체제로 이끌어온 아베 신조 총리(왼쪽)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재정 정책에 대한 시각차와 일본 국채 신용등급 하락을 계기로 금이 가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달 12일 오후 5시 일본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에 있는 총리 관저 4층 회의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등 현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둘러 앉았다. 일본의 경제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경제재정 자문회의’. 의장은 아베 총리다.

 회의석 구석에 앉아 있던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프 더 레코드(비공개)로 해줬으면 좋겠다.” 좀처럼 발언하는 법이 없는 구로다 총재가, 그것도 발언의 비공개를 요구하자 참석자들 얼굴에서 순간 긴장이 흘렀다.

 현재 의사록에 남아있는 구로다의 발언은 “재정 건전화를 강하게 기대한다”는 원론적인 세 문장. A4 용지로 불과 7줄. 시간으로는 수 초 분량이다. 그러나 ‘진본’은 달랐다. 그는 10분 가까이 제스처를 써가며 열변을 토했다. 아베 총리와 설전까지 벌였다. 일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날 회의는 아베 정권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왜냐하면 ‘아베노믹스’의 양대 축이었던 아베와 구로다의 밀월 관계가 이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내리막길로 돌아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는 20일로 취임 2년을 맞는 구로다 총재를 그토록 화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일 총리 관저의 핵심 관계자가 귀띔한 전말은 이렇다. 회의 초반 한 민간위원과 아소 부총리가 발언에 나섰다. 요체는 “‘재정 건전화’와 ‘경제 활성화’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이냐” 였다. 민간위원이 “기초 재정수지(국채 발행 등 새로운 빚을 내지 않고 정책 실행에 필요한 경비를 얼마만큼 마련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를 2020년까지 흑자로 만든다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먼저 경제 활성화를 통해 세수를 늘리면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흑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아소 부총리가 거들었다. “그럼요, 재정도 중요하지만 재정 건전화 작업을 통해 ‘세수=세입’수준으로 맞춘다 한들 다시 경기가 나빠지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양자 모두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위해선 ‘경제 활성화 우선’ 노선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구로다 총재의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일본 국채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상황에서 스위스 바젤 은행감독위원회에선 ‘일본 국채를 손실이 나지 않는 안전한 자산으로 여기는 건 이상한 것 아니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어요. ‘손실 우려가 있는 위험자산’으로 변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일본 국채를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리스크가 될 수 있어요.” 재정이 이대로 악화돼 일 국채 가치가 떨어지면 경제 활성화건 아베노믹스건 말짱 헛것이 되고 말 것이란 경고였다.

 실제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지난해 12월 일본의 국채 신용등급을 ‘Aa3’에서 위로부터 다섯 번째인 ‘A1’으로 한 단계 강등했다. 3년4개월 만이다. 한국·중국(Aa3) 보다 등급이 낮아진 것이다. ‘피치’ 또한 올 상반기 중 강등 여부를 결정한다.

 지난해 말 기준 일본의 국채 발행 누적 규모는 780조 엔(약 7200조원). 국민 1인당 615만 엔(약 56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채 비율이 156%, 지방까지 합하면 200%에 가깝다. 주요 선진국 중 압도적 1위다.

 일본의 한 국제금융 전문가는 “구로다 총재는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금융정책·재정정책·성장전략) 중 첫 화살인 금융은 자신이 주도한 대규모 완화 정책을 통해 성공을 거뒀다고 자부한다”며 “그런데 아베 정부가 둘째, 셋째 화살을 미적거리고 처리 못하자 분통을 터뜨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구로다는 이날 “이러다간 일본 국채를 팔겠다는 논의가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언제까지나 일본 국채가 문제없을 것이란 생각은 이제 통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란 말을 반복했다 한다. 계속 돈만 찍어내 경제 활성화를 하는 게 아베노믹스의 본질이 아니라고 아베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항명’에 가깝다.

 일본 국채의 90%가량을 일 국내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국채 신용등급이 급락하면 일 금융기관이라 한들 ‘국채 폭락→금리 상승’의 부담을 언제까지 떠안고 있을 수 없을 것이란 게 구로다의 생각이다.

 구로다의 격한 발언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베가 결국 발끈하며 쏘아 부쳤다. “아, 그러니까 (일본은행이) 신용평가기관과 잘 논의해서 (설득)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일본은행이 재정 문제에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국제 금융기관이나 잘 다독거리라는 핀잔이었다.

 하지만 구로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말이죠, 내가 예전에 일 국채가 부당하게 등급이 강등당했을 때 얼마나 신용평가사와 붙었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논의를 해도 그런 데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요.” 2002년 국제부문 책임자인 재무관 재임 중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아베의 발언을 맞받아친 것이다.

 아베와 구로다의 밀월은 이처럼 2년 만에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아베가 지난달 25일 일본은행의 새 심의위원으로 구로다 총재와 노선이 다른 하라다 유타카(原田泰) 와세다(早稻田)대 교수를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일본인들은 아베가 이념적으로 우익이라고 내치진 않는다. 일본 사회가 그만큼 보수화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는 별개다. 더구나 지난 2년 ‘아베노믹스 버블’로 일 국민의 ‘경제 기대치’는 한껏 높아진 상황이다.

 구로다 총재의 임기는 2018년 4월. 아베와 구로다의 ‘신 냉전’이 아베의 장기 집권을 가로막는 뇌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김현기 도쿄특파원


◆세 개의 화살=아베노믹스의 세 핵심 요소인 양적 완화(QE)와 재정 지출 확대, 성장 전략 추진을 말한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취임하면서 옛날 일본 무사가 아들들에게 화살 한 개를 부러뜨리긴 쉽지만 세 개를 한꺼번에 부러뜨리기는 힘들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일본 정부가 1990년 이후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실시한 양적 완화, 재정 지출, 성장 전략 정책을 한꺼번에 밀고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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