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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볼 수 있을때까지는…' 구경선 작가의 버킷 리스트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소개팅 해보기, 운전면허증 따기,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기…’



그림 작가 구경선(31)씨는 자신의 다이어리에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적어 나갔다. 꼭 해야 할 일들이 서른 가지나 됐다.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그리고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귀가 유난히 큰 토끼 캐릭터 ‘베니’는 구 작가가 그린 자신의 분신이다. 2008년 싸이월드 스킨 작가로 데뷔한 이후 줄곧 베니와 함께했다. 구 작가는 두 살 때 열병을 앓은 뒤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베니에게는 세상의 무슨 소리든 잘 들을 수 있는 큰 귀를 그려주었다. 대신 작가에겐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눈, 향기를 맡는 코,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눈도 보이지 않게 될 거란다. 2년 전 진단 받은 망막색소변성증.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 실명하게 될 수도 있다는 희귀성 질환이다.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거야?’ 세상이 미웠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 차 있을 무렵 필리핀으로 선교 활동을 갔어요. 태풍으로 모든 걸 잃은 한 소년을 만났는데, 소년은 제게 사진작가가 돼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다고 말했죠.” 그런 소년에게 구 작가는 별 생각 없이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러자 소년은 밥도 먹지 않고 한참 동안 그림을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 속 분노가 가라앉았다. “한 줄기 빛을 본 기분이었어요. '아직 내겐 많은 것이 남아 있다'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부터 버킷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해 하나씩 이뤄나가는 중이다. 최근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에세이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출간했다. 책에는 구 작가의 '너무 아팠지만 돌아보면 선물 같았던 어제', '하고 싶은 게 많아 설렘 가득한 오늘', '희망으로 기다려지는 내일'이 그의 분신 베니와 함께 담겨 있다.



요즘 그는 언젠가 다가올 ‘그날’에 대비해 점자 공부와 지팡이 다루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현재 구 작가의 시야는 8.8cm. 지름 8.8cm 원통을 눈에 대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정면을 보고 걷다 보면 옆과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아 장애물에 부딪히기 일쑤다.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는 그나마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주로 해 지는 저녁에 산책도 할 겸 밖으로 나가 지팡이를 잡아봐요. 눈 감고 연습하는 건 아직 무섭거든요.”



지금까지 이룬 버킷 리스트 중 가장 뿌듯했던 건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였다. 유년 시절 그의 어머니는 놀고 싶어하던 꼬마 구 작가를 앉혀놓고 발음을 가르치거나 어린 딸이 홀로 고립되지 않도록 친구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언제나 어머니는 그의 든든한 서포터였다. 생애 처음으로 구 작가 표 소고기 미역국을 끓인 그날,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딸이 미역국을 끓일 수 있도록 딸의 눈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했다.



‘당장 내일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따금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구 작가는 그 두려움을 애써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휴대전화를 내팽개친 채 잠을 자거나, 혼자 그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기도 한다.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그는 믿고 있다. 그날이 온다면 한동안 울며 좌절할 것이다, 그러다가도 이내 아무렇지 않게 현실을 받아드리며 살아갈 것이다, 신기하게도 사람의 인생이란 게 그렇다, 라고.

구 작가와의 인터뷰는 카카오톡 채팅으로 진행됐다. 이런 채팅이 그에게는 일종의 ‘통화’ 개념이다. 요즘 그는 눈에 좋은 음식이나 약을 먹고 유산소 운동을 하는 등 눈 관리에 한창이다. 설사 반갑지 않은 ‘그날’이 올지라도 한줄기 희망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했다. ‘소리를 잃고 시력을 잃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잖아요. 아직 기분 좋은 향기가 남아 있어요. 아직 제겐 많은 감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 같아요.(책 『그래도 괜찮은 하루』 중)’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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