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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조선은행, 일본 정부에 순종하다 수렁에 빠지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정상들(왼쪽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배상과 영토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이 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설명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1919년 3·1독립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이런 국제적 흐름과 분리해서 설명하기 힘들다.
한·일 수교 50주년에 맞이한 지난주의 3·1절은 새삼스러웠다. 96년 전의 그 함성은 갑자기 터진 게 아니었다. 한 달 전인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 있었고, 한 해 전인 1918년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있었다.

⑨ 일제 강점기 중앙은행의 탈선

민족자결주의도 윌슨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프린스턴대학교 총장 출신의 윌슨 대통령이 평등주의(egalitarianism)라는 시대정신을 읽고 이를 외교정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1911년 중국에서는 공화국을 갈망하는 시민의식이 400년 역사의 청나라를 무너뜨렸다(신해혁명). 1917년에는 러시아의 ‘차르’ 체제가 막을 내리고 소비에트공화국이 들어섰다(볼셰비키 혁명). 1918년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이 터졌다. ‘융커(지방귀족)’들의 지배에 염증을 느낀 독일 국민이 연합군과 전쟁을 치르던 도중에 갑자기 공격의 방향을 틀어 비스마르크가 만든 독일제국을 무너뜨리고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운 것이다(독일혁명).

이 무렵 일본에서도 시민들의 힘이 분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쌀값 폭등에 분노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내각이 붕괴한 것이다. 이를 ‘1918년 쌀 소동’이라고 한다(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내각이 붕괴할 정도의 사건을 ‘소동’이라고 부른다).
 
1918년 ‘쌀소동’ 당시의 모습. 매점과 담합을 통해 쌀값 폭등을 조장한 이유로 시민들의 원성을 샀던 스즈키(鈴木) 상점이 한밤중에 화염에 싸여 있다.
물가 폭등으로 무너진 데라우치 내각
유럽 대륙 전체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큰 홍역을 앓고 있을 때 일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나 홀로 수출’을 즐겼다. 그 결과 일본의 정화(正貨) 보유액 즉, 금 보유액도 4억 엔(1913년)에서 22억 엔(1920년) 수준으로 급증했다. 거기에 더해서 독일이 점령하던 중국의 칭다오(靑島)와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 일대까지 점령지역을 넓히는 전과(戰果)를 거뒀다. 이렇게 해외 판로가 확보되면서 일본 내수경기에도 불이 붙었다.

유래 없는 호황의 대가는 물가폭등이었다. 특히 쌀값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3배로 뛰었다. 젊은 농업인구들이 도시로 몰려 농촌인구가 감소한 데다가 지주들과 연계된 쌀 도매상 즉, 스즈키(鈴木)상점과 같은 독점재벌들이 가격을 담합했기 때문이다.

몇 년 사이에 국가는 훨씬 부강해졌으나 삶은 더 팍팍해졌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내 1918년 7월 22일 도야마 현(富山?)의 작은 어촌에서 아낙네들이 쌀가게를 습격하고 불태우는 사건이 터졌다. 이후 “쌀값을 내리라”는 요구와 폭동이 전국으로 퍼졌다.

데라우치 내각은 처음에 언론사에 엄포를 놓고 보도를 통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러시아 간섭전쟁). 러시아에 억류된 체코독립군을 구출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사실은 국내의 불만과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고전적인 통치술이었다.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경찰과 군인들까지 폭동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데라우치는 결국 사임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조절과 물가관리에 실패한 결과였다.

하지만 성난 민심을 쉽게 잠재울 자신이 없었다. 여당 수뇌부 안에서 서로 총리직을 사양하다가 하라 다카시(原敬)를 총리로 추대키로 했다. 군인 출신의 데라우치에 비해서 외교관 출신의 하라가 민심을 수습하기에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18년 9월 29일 데라우치 내각이 퇴진하고 하라 내각이 출범했다.

특혜 받고 부실대출에 나선 조선은행
취임 직후 하라 총리는 두 가지를 선언했다. 첫 번째는 ‘산미증식계획(1920~1934년)’이다. ‘쌀 소동’의 근본 원인인 식량부족 해결을 위해 조선에서 가져오는 식량을 대폭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의 식량사정은 점차 호전되었지만, 조선의 기근은 더 심각해졌다. 조선 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으로 배를 채우면서 일본으로 쌀을 보냈다.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채만식의 『탁류』에서 그려지는 쌀 수출항 군산(群山)의 부산한 모습은 일본의 ‘쌀 소동’이 조선에 가져온 나비효과였다.

하라 총리가 두 번째로 밝힌 것은 ‘대 중국 불간섭원칙’이다. 데라우치 내각은 각종 이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중국의 군벌 돤치루이(段祺瑞)에게 총 2억4000만 엔 규모의 ‘정치차관(통치자금)’을 제공해 왔다. 그런 반역적인 거래를 눈치 챈 중국인들은 반일감정을 불태웠고, 외교관 출신의 하라 총리는 그것을 염려했다. ‘대 중국 불간섭원칙’은 중국에 대한 돈줄을 끊겠다는 선언이었다.

데라우치 내각의 대중(對中) 자금제공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특히 요코하마정금은행(?浜正金銀行)의 반대가 컸다. 이 은행은 1899년 잉커우(營口)에 진출한 뒤 봉천·장춘·하얼빈 등 만주 각지로 영업망을 넓혔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만주지역의 무질서한 화폐제도를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이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를 이 지역의 법화(法貨)로 인정했다(1905년 만주 화폐제도 통일에 관한 특별명령). 이는, 상업은행이었던 일본 제일은행의 은행권을 유통시켜 조선의 화폐제도를 흡수(1902년)했던 것과 똑같은 조치였다.

그런데 1916년 10월 출범한 데라우치 내각은 그 방침을 뒤집었다. 조선총독 출신의 데라우치 총리는 ‘선만일체화(鮮滿一體化)’ 즉, 조선과 만주를 하나로 만들어 지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조선은행이 만주의 중앙은행 역할을 겸하도록 했다. 즉 조선은행권이 만주와 몽고에서 강제통용력을 갖도록 하고 관동주 등에서 조선은행에 국고금 취급업무를 맡겼다(1917년 만주에서의 특수은행 기능의 통일에 관한 건). 갑자기 특권을 잃은 요코하마정금은행은 만주에서 활개치는 조선은행을 두고 “탈선했다”고 맹비난했다.

반면, 데라우치 내각에서 각종 특혜를 받은 조선은행은 정부가 시키는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섰다. 중국의 봉천성·직예성 등에 단독으로 차관을 제공하기도 하고, 상업은행들과 함께 ‘해외투자은행단’의 일원이 되어 투자하기도 하고, 대만·일본흥업은행 등의 특수은행들과 함께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중국 측에 대출하기도 했다.
 
니시하라 차관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 니시하라 차관은 데라우치 내각의 최대 금융 스캔들이었으며, 10여 년간 조선은행의 발목을 잡은 악재였다.
정부의 요구를 판별하는 균형감각이 중요
중국에 제공된 수많은 자금 중 조선·대만·일본흥업은행의 신디케이트를 통해 제공된 1억5000만 엔의 자금을 ‘니시하라(西原) 차관’이라고 한다. 차관 조건을 협상했던 행동책 니시하라 고메조(西原龜三)의 이름에서 나왔지만, 그의 뒤에는 데라우치가 있었다. 데라우치는 조선은행 등 특수은행들을 통해 1억5000만 엔을 제공하여 돤치루이 정권이 외국 빚을 모두 갚도록 한 뒤 3억5000만 엔을 더 공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중국의 화폐제도를 일본의 지배권에 둔다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그것이 발권기관인 조선은행을 굳이 끌어들인 이유였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조선은행이 제공한 5800만 엔 중 회수된 것은 거의 없었다(1917년 말 현재 조선의 화폐발행액이 6700만 엔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천문학적 숫자다). 다른 차관들도 결과는 비슷했다. 중국에 제공한 총 2억4000만 엔 규모의 자금 중 회수한 것은 500만 엔에 불과했다. 그나마 ‘쌀 소동’ 으로 내각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막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쌀 소동’과 그에 따른 문민정부의 출범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즉, 메이지유신과 만주사변 사이에 정당정치와 자유주의가 잠시 꽃피었던 시기의 절정이었다.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피지배계층이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3·1독립운동, 그리고 니시하라 차관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 중국의 5·4운동(1919년)과 일맥상통한다.

중앙은행은 때때로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하도록 요구받는다. 중앙은행의 역사가 짧거나 힘이 없을수록 그런 경우가 많다. 한국은행은 설립된 지 65년을 맞는 지금도 정부로부터 종종 출자와 출연 요구를 받는다(정부는 그때마다 국익을 강조한다). 영국이 홍콩에 설립한 홍콩상하이은행(1865년)과 프랑스가 사이공에 설립한 인도차이나은행(1875년)은 발권력을 통해서 주변국에 투자나 대출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들 은행은 정부의 요구에 대부분 응했지만, 가끔 거부했다. 그래서 마찰도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행은, 조선만이 아닌 선만지(鮮滿支) 즉, 조선·만주·중국을 아우르는 동북아 전체의 중앙은행이 되라는 정부의 요구에 군말 없이 순종했다. 아니, 속으로는 환영했다. 그것은 분명히 탈선(脫鮮)이자 탈선(脫線)이었다.

조선은행은 하라 내각의 ‘대 중국 불간섭 원칙’을 계기로 탈선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행은 엄청난 손해를 가져온 그 정책실패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 국익을 앞세우는 정부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바람에 그 후 더 큰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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