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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건창, 올해는 무심타법으로 ‘201안타+1’ 꿈꾼다

2014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인 서건창은 스스로를 미생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목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SK전에서 3루타를 친 뒤 질주하는 모습. [중앙포토]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에게 물었다. “최고 선수가 된 뒤 맞이하는 새 시즌은 어떤가? 자신감이 생겼는가? 혹은 부담감이 느껴지는가?”

막 오른 2015 프로야구

 2014년 MVP 서건창(26·넥센)이 답했다. “어떤 선수인지는 내 자신이 잘 안다. 자신감을 가질 만한 선수가 아니다. 그래서 부담감도 없다.”

 지난달 말 일본 오키나와 넥센 캠프에서 서건창을 만났다. 지난해 한 시즌 최다안타(201개)를 때리며 MVP가 됐지만 그는 예전에 인터뷰할 때와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여전히 진중했고, 겸손했으며, 야구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장그래와 닮은꼴 인생 서건창
지난해 TV 드라마 ‘미생(未生)’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주인공 장그래는 프로바둑 기사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고졸 학력에 변변한 스펙이 없는 그는 대기업 종합상사의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쟁쟁한 동료들과 경쟁했다. “제가 죽을 만큼 열심히 하면 되는 겁니까”라며. 냉혹한 세상 속에서 큰 실패와 작은 성공을 오가는 장그래를 보며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드라마 속 장그래와 그라운드의 서건창은 공통점이 많다. 처연한 눈빛과 간절한 마음이 닮았다. 심지어 서건창은 장그래를 연기한 배우 임시완과 외모까지 비슷하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2008년, 서건창은 LG에 입단했다. 정식 선수가 아닌 연봉 2000만원의 연습생(육성선수) 신분이었다. 프로야구 최저 연봉(24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를 받는 ‘야구판 비정규직’이었다. 2008년 1군에서의 한 경기가 그에게 주어진 기회의 전부였다. 이듬해 그는 유망주들에게 밀려 LG에서 방출됐다.

 서건창은 변변한 이력이 없어 상무나 경찰 야구단에 갈 수 없었다. 현역병으로 입대한 그는 제대 후 다시 도전했다. 2012년 넥센이 그를 받아줬다. 신분은 여전히 연습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작은 희망의 끈이라도 잡은 것에 감사했다. 그해 주전 2루수를 꿰차고 타율 0.266, 홈런 1개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다. 2013년 부진에 빠져 그저 그런 선수로 주저앉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2014년 타격 폼을 확 바꾸며 프로야구에서 가장 까다로운 타자가 됐다.

 지난해 MVP 후보 5명 중 4명이 넥센 선수였다. 3년 연속 홈런왕(52개)에 오른 박병호(29), 유격수 최초로 40홈런을 터뜨린 강정호, 20승 투수 밴헤켄, 그리고 ‘똑딱이 타자’ 서건창이었다. MVP는 주로 홈런왕이나 다승왕의 차지였다. 1983년 장효조(삼성), 94년 이종범(해태), 2010년 이대호(롯데)는 타격왕에 올라 MVP를 거머쥐었다. 모두 홈런도 잘 쳤던 타자들이었다. 지난해 타율(0.370)·안타(201개) 1위 서건창의 홈런은 7개에 불과했다.

 투표 전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기록은 서건창 편이 아니었지만 ‘표심(票心)’은 그에게 쏠렸다. 유효표 99표 중 77표를 얻었다. ‘감성표’도 있었다.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을 응원한 것이다.

 서건창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살았다. “가족을 위해 뛴다. 야구로 꼭 성공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프로구단 지명을 받지 못했을 때도, LG에서 방출됐을 때도, 2013년 긴 부진에 빠졌을 때도, 가족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머니 정수현씨는 “일찍 철든 아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지금 이렇게 잘해준 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박병호와 강정호 모두에게 2014년은 최고의 시즌이었다. 그러나 둘은 “주인공은 서건창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건창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까이서 똑똑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서건창 같은 선수가 성공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건 다른 선수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장석 넥센 대표가 올해 그의 연봉을 3억원(2014년 연봉 9300만원)으로 올려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적장(敵將) 김경문 NC 감독도 근성을 칭찬했다. 김 감독은 “참 열심히 하는 선수다. 안타를 계속 치는 걸 보고 ‘여유를 부릴 만도 한데’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악착같이 뛰더라.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했다.

“새로운 시즌됐으니 다시 도전할 뿐“
바둑용어인 미생은 ‘아직 살아 있지 않은 돌’이라는 뜻이다. 프로바둑 기사가 되려다 실패했고, 상사원으로서 아무런 경쟁력을 갖지 못했던 장그래를 잘 빗댄 표현이다. 드라마에서 장그래는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뒤 회사를 쓸쓸히 떠난다. 그는 몇 년 후 유창한 영어실력에 자신감도 갖춘 유능한 사원으로 돌아왔다. 미생은 완생(完生·외부가 막혀도 살아있는 바둑돌)이 된 것 같았다. 드라마다운 결말이었다.

 프로야구의 미생은 MVP가 되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어떤 선수인지 잘 안다”는 서건창의 말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난해 201안타를 쳤다고 올해도 200개 이상 때리겠다고 자만 않는다. “새로운 시즌이 됐으니 다시 시작하고 도전할 뿐입니다.”

 서건창은 “지난해 내게 딱 맞은 폼을 찾았다.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타격은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동작이므로 준비자세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더 좋은 게 있다면 배우고 받아들일 것”이라고도 했다. 언제든 무엇이든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키 1m76㎝의 서건창은 지난해 온몸을 움츠리는 타격을 했다. 두 무릎을 오므리고 두 발을 땅에 고정했다. 그립을 배꼽 높이까지 내려 백스윙을 최대한 줄였다. 이 희한한 동작들은 투구를 끝까지 보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2013년 부진이 이어지자 서건창 스스로 고안한 자세다. 장그래의 삼촌이 “파격이 없다면 고수가 될 수 없다”고 한 충고를 서건창은 자신에게서 들었다. 서건창이 이 폼으로 안타를 계속 때려내자 두산 정수빈(25)도 서건창의 ‘배꼽타법’을 따라했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서건창의 몸은 지난해보다 조금 커져 있었고 더 단단해 보였다. 동계 근력훈련을 많이 한 덕분에 파워가 세진 것이다. 주위의 기대가 커졌고, 그에게 2루타 이상의 장타를 기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서건창은 자신을 여전히 미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장타를 늘리고, 더 많은 안타를 치는 건 그에게 너무 거창한 목표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독하게 노력하고 겸허하게 공부하는 게 서건창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는 “많은 분들이 ‘또 200안타를 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난해 내가 그런 목표를 가졌던 게 아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끝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난 그저 한 경기, 더 작게는 한 타석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아직 살지 않은 미생은 다르게 보면 아직 죽지 않은 돌이다. 한 번 성공했다고 완생이 되는 건 아니다. 숱한 실패를 겪으며 꽤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된 서건창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자만은 아직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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