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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마이웨이 ⑭ <끝> 상류층 1% 위한 디자이너, 밑바닥 1%의 수호천사 되다

디자이너 이광희씨가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자신의 부띠끄에서 60세에 새로 맞은 자원봉사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평생의 업’을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재능도 무시 못할 것이고 적성과 성품도 잘 맞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착착 들어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존재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 직업에도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화려한 빛 속에서 짙은 그림자를 감당한 이들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 톱디자이너로 불리는 이광희(63), 그녀 역시 그랬다.

희망심는 디자이너 이광희

얼마 전 그의 초대로 패션쇼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무대 위의 옷도 그렇지만 테이블의 꽃장식과 식기 세팅, 심지어 냅킨까지 너무 예뻐서였다. 알고 보니 그가 전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단다. 미적 재능을 그야말로 타고났나 보다.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디자이너로 성공했으니 오죽하랴. 그러나 패션사업이 어디 미적 재능 하나로 완성되는 일인가. 그에게 비즈니스는 큰 문제였단다. 원체 내성적이라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어려운 게 없었단다.

손님 오면 화장실서 심호흡하고 나와
“어렸을 때부터 낯가림이 심하고 말이 없어 대인기피증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어요. 그런 사람이 비즈니스를 하려니 힘들었죠 예전엔 고객이 오면 화장실에 들어가 심호흡부터 하고 나왔다니까요.”

만약 직업에 성품을 끼워 맞추려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무게에 눌려 오래 버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거꾸로 직업에 자신의 성품을 담았다. 고객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시간에 틀어박혀 일만 했다. 소위 말하는 네트워크를 위한 일체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철저히 사전예약제를 운영해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다. 여린 성품에서 그런 강단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부모님은 ‘해남의 등대’로 불렸던 고(故) 이준묵 목사와 김수덕 여사다. 두 분은 전쟁 직후 땅끝마을에 등대원을 세우고 갈 곳 없는 고아 수천 명과 나환자들을 돌봤다. 그의 정신적 멘토였던 어머니는 평생을 한 복 세벌로 살면서 수많은 이들을 먹이고 입혔다. 그런 두 분이 디자이너의 길을 가는 딸에게 늘 했던 얘기가 있었다. “항상 정도(正道)를 걸어라. 무슨 일이든 혼을 담아라.”

두 분의 말씀은 그의 직업인생을 비추는 등대가 됐다. ‘어떻게 일하느냐’는 그에게 ‘어떻게 사느냐’와 같았다. 일을 쉽게 하는 것은 삶을 쉽게 던져버리는 것이라 여겨 매 선택마다 일부러 힘든 쪽을 택했다. 그렇게 고집한 ‘좁은 길’은 결과적으로 성공의 지름길이 됐다. 29살에 시작한 작은 의상실이 6년 만에 ‘이광희 부띠끄’라는 이름의 명품 브랜드가 된 것이다. 그녀는 30대 중반에 영부인은 물론이고 재벌가 부인, 연예인 등 상위 1%가 찾는 정상급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라섰다.

내일 그만둘지 몰라 오늘 일에 최선
그 정도면 잠시 트로피를 즐길 법도 하건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직업을 선택하면서부터 마음에 품어온 사명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80년대는 패션 디자인이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다. 패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그가 스스로에게 지운 책임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1988년의 ‘콜라보레이션 패션쇼’다. 지금이야 각 예술 장르간의 융합이 새로울 것 없는 일이 됐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패션쇼 무대에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항성 화백의 작품이 걸리고, 당시 최고의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교수와 오케스트라가 등장했다. 당시 이항성 화백은 그의 옷에 직접 작품을 그려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패션도 미술·음악 못지않은 예술의 한 장르임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다. 패션에 기부를 접목한 것도 그만이 할 수 있었던 도전이었다. 80년대에 겁도 없이 패션쇼 티켓을 무려 6만원에 팔았다. 누가 오겠냐며 다들 말렸지만 당일 날 패션쇼장 앞에 600여명이 줄을 섰다. 여기에는 그의 뜻에 공감한 명사들의 도움이 컸다. 당시 가수 윤형주가 연출을 맡고 사회는 차인태가 봤다. 또 가수 구창모, 사진작가 김중만 등이 나서 한편의 버라이어티쇼를 만들었다. 이렇게 모아진 돈은 힘겨운 이웃들에게 값지게 쓰이곤 했다.

그렇게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30년을 디자이너로 살았다. 내일 그만둘지 모르니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정말 좋아서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하루하루 사명감으로 견뎌온 날들이 더 많았다. 해남의 부모님 일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도 그를 버티게 한 이유였다. 힘들어 눈물이 날 때면 어머니 말씀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나이 드신 후에는 귀가 안 들려서 전화를 해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어요. 딸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당신께선 늘 이렇게 물으셨지요. ‘오늘도 참아봤느냐.’ 제게는 그것이 삶의 모든 답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결국 상당수가 타고난 재능, 혹은 책임감이 시키는 일을 한다. 그래도 억울하거나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한 직업 안에서 얻는 깨달음과 성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일을 만났을 때, 평생 갈고 닦은 저력이 제대로 발휘되기도 한다. 그도 운명처럼 그런 일을 만났다. 하필 은퇴하기로 마음먹은 나이 60에.

2009년, 평소 친했던 탤런트 김혜자를 따라 우연히 남수단 톤즈에 봉사활동을 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웬만한 아프리카의 가난한 동네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황무지였다. 현지인들에게 제일 유용하다는 망고나무 묘목을 심어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톤즈 마을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다시 가고 싶고, 그들과 함께 뭔가를 하고 싶은 열정이 저절로 솟았다. 그의 인생에도 마침내 ‘심장이 뛰는 일’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30년간 울면서 갈고 닦은 비즈니스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톤즈와 서울을 오가며 ‘희망고’라는 법인을 세우고 자선패션쇼를 기획했다.

톤즈 주민들에게 ‘마마리’로 불려
그의 고객을 비롯해 많은 명사들이 희망고의 후원자가 됐다. 그 사이 현지에는 수 만 그루의 망고나무가 심어졌고 ‘희망고 빌리지’라는 교육복지센터가 세워졌다. 그곳에서 아빠들은 목공을, 엄마들은 재봉을 배우는 동안 아이들은 깨끗한 탁아시설에서 어울려 놀고 공부한다. 다른 NGO라면 10년 넘게 걸릴 일을 희망고는 단 3년 만에 이뤄냈다. 여기에는 그에 대한 톤즈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이 됐다. 디자이너 이광희는 현지에서 ‘마마리’로 불린다. 작은 것이라도 한번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켰고,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도맡아 했다. 그는 희망고를 세울 때도 ‘남들이 가기 힘든 곳에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난 2월에는 톤즈의 한센병 환자촌을 찾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기 위해.

“처음에 환자들 사진을 보고 저조차도 왜 이런 걸 찍어왔냐며 외면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이분들 생각에 하루 종일 우는 거예요. 이건 운명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갔습니다. 환자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돕기로 했는데 톤즈 정부에서 환자촌 옆의 망고농장 10만평을 무상으로 쓰라고 내줬어요.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죠(웃음).”

톤즈 얘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다. 희망고 일을 하면서 부쩍 밝아지고 본래의 패션 일에도 활력과 아이디어가 샘솟는단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아름다운 선순환이 이런 것일까. 사랑의 나무는 그의 마음속에도 이미 푸르게 자라고 있다.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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