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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드레스를 제작한 영국 업체가 파랑-검정으로 확인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흰색-금색 파는 경악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파랑-검정 파도 정답(?)을 맞췄다는 기쁨보다 같은 사진이 전혀 다른 색깔로 인지되는 것에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느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없는 지인들에게도 사진을 보내 드레스 색깔을 물었는데, 그중 유명 사진작가가 독특한 답을 주었다. 연보라색 가까운 파란 바탕에 갈색 줄무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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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는 빛에 따라 달라지죠. ‘빛의 예술’인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가장 예민해요. ” 이 사진작가가 말한 ‘빛에 따른 색채 차이’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지각이 바로 드레스 색깔 논란의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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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보는 것’은 카메라 필름과 같은 망막에 맺히는 정보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대뇌 후두엽 시각피질에서 처리되는 시각 정보다. 그리고 그 처리과정에서 과거의 경험·판단, 그리고 심지어 감정까지 개입하기 때문에 드레스 색깔 논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는 것’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사진을 놓고도 우리는 다른 것을 보지 않는가.
드레스 색깔 논란을 보면서 서구 현대미술이 르네상스부터 신고전주의에 이르는 ‘사진 같은 그림’에서 왜 벗어났는지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나온 사진의 도전에 맞서 화가들은 사진과 차별화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사진 같은 이미지가 과연 ‘인간이 궁극적으로 보는 것’인가에 대해 깊이 탐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궁극적으로 본 것’은 색채 항상성을 탈피해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의 찰나적 인상이었다. 표현주의 선구자 에드바르 뭉크가 패닉에 빠진 심리로 ‘궁극적으로 본 것’은 형태가 일그러지고 색채가 섬뜩한 세상이었다.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궁극적으로 본’ 사람의 얼굴은 여러 다른 앵글과 시간에서 본 모습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걸 화폭에서 해체해서 눈·코·입이 따로 노는 괴이한 초상화를 그렸다.
이것은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20세기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이론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메를로 퐁티는 그의 현상학 이론에서 인간이 신체 감각기관을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만 외부세계를 지각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처럼 드레스 색깔 논란은 많은 과학적, 인문학적 함의를 품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뇌의 정보 처리에 따라 같은 사진의 옷 색깔도 극단적으로 다르게 볼 정도니, 인간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얼마나 주관과 편견이 많이 섞여 있을까.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