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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스물다섯인 그녀에게

[매거진 M] 故이은주 10주기를 추모하며







불꽃처럼 짧은 삶을 살다간 여배우 이은주. 그가 우리의 곁을 떠난 지 10년이 됐다. 지난달 23일 서울 CGV 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는 이은주 10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다. 그의 팬들과 지인, 영화 관계자 300여 명이 ‘번지점프를 하다’(2001, 김대승 감독) ‘연애소설’(2002, 이한 감독) 등 그의 출연작을 함께 관람하며 고인을 추억했다. 배우 이은주의 짧고도 화려했던 필모그래피를 생생히 지켜봤던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가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연애소설




그날은 눈이 많이 왔다. 22일이었으니, 월간지 마감 막바지 중의 막바지였다. 모든 원고를 끝내고 교정지를 기다리다가 믿을 수 없는 뉴스를 접했다. ‘배우 이은주 사망.’ 갑작스레 찾아온 혼란 속에서, 나는 그 배우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2000년 겨울. 개봉을 두 달 정도 앞둔 ‘번지점프를 하다’ 인터뷰 자리였다. 피차 영화를 보지 못하고 하는 인터뷰였기에, 영화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진 못했다. 대신 “소울메이트를 믿나요?” 같은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 이은주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젠 나에게도 분명히 소울메이트가 존재한다고 믿어요. 키우던 강아지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새 강아지를 키우는데… 죽은 강아지랑 너무나 똑같아요. 내 배 위에 누워서 쌔근쌔근 자는 버릇까지요.” 그러면서 ‘송어’(1999, 박종원 감독) ‘오! 수정’(2000, 홍상수 감독)에 이은 세 번째 영화, 아니 ‘해변으로 가다’(2000, 김인수 감독)의 카메오 출연까지 합하면 네 번째 영화인 ‘번지점프를 하다’로 이루고 싶은 소망을 역시 조용히 이야기했다. 관객에게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보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날 인터뷰에선 주로 ‘이은주가 하고 싶은것’에 대해 들었던 것 같다.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하는 그녀는 사랑스러운 여인처럼 보이고 싶어서 ‘번지점프를 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귀여운 여인’(1990, 게리 마샬 감독)을 다시 봤다고 했고, 언젠가는 ‘미술관 옆 동물원’(1998, 이정향 감독)의 춘희(심은하) 같은 역을 꼭 해볼 거라고 했다. ‘엔트랩먼트’(1999, 존 아미엘 감독)의 캐서린 제타 존스 같은 섹시한 액션 연기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스무 번째 생일이라며, 성년이 되는 설렘을 전했다.



그렇게 첫 만남은 끝났고, 이후에도 인터뷰든 시사회든 기자 간담회든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잠시라도 “쉬고 싶다”고 했다. ‘안녕! 유에프오’(2004, 김진민 감독)를 끝내고 TV 드라마 ‘불새’(2004, MBC)에 출연하고 ‘주홍글씨’(2004, 변혁 감독)를 찍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 사이엔 무산된 프로젝트인 ‘소금인형’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20대 초반의 여배우에게서 삶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게 조금은 안쓰럽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잘나가는’ 배우이기에 가능한 푸념이라고도 여겼다. 해가 바뀌었다. 2005년 2월 22일. 그녀는 슬픈 소식을 전해왔다.





무채색의 깊이를 품다



이은주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그토록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젊은 여배우는,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25세라는 나이로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됐다. 그녀가 왜 스스로 삶을 정지시켰는지 그 이유를 되새기는 건, 이젠 부질없어 보인다. 이은주는 지쳤고, 쉬고 싶었고, 우울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죽음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그녀의 삶과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아닐까 싶다.



번지점프를 하다




‘이은주’라는 배우에 대해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무채색의 느낌이다. 색상이나 채도 없이 명도만 존재하는 무채색처럼, 이은주의 연기는 각 작품마다 밝음과 어두움을 달리하며 영화의 빛과 그림자에 스며든다.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이은주의 가장 아름다웠던 이미지가 ‘오! 수정’으로 남아 있는 건 그녀의 톤과 이 영화의 흑백 화면이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골목길이든, 눈이 시리게 빛나는 흰 눈이든, 그녀는 하나의 피사체로서 너무나 조화롭게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무채색의 개성은 연기를 단조롭게 보이게도 한다. 이은주의 캐릭터에서 반복되는 어떤 패턴은 단조롭다는 느낌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녀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병을 앓고 있고, 엇갈린 사랑을 하며, 죽음이나 공포 가까이에 있다. 이런 반복 속에서 그녀는 운명의 덫에 빠진 듯 보이지만 그녀의 캐릭터들은 종종 운명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선 소울메이트로 다시 태어난다. ‘연애소설’에선 영원히 기억될 편지를 보내고, ‘하늘정원’(2003, 이동현 감독)에선 천사의 이미지로 남는다. ‘안녕! 유에프오’에선 눈이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 상대방을 본다.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이은주에겐 이 작위성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고유의 느낌이 있다. 무채색의 감정적 여운과 깊이 같은 것이다. 특히 ‘연애소설’은 인상적인데, 이 영화의 경희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밝게 웃고, 사랑을 간직하고, 조용히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이은주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뉘앙스였다.



물론 이은주의 캐릭터에서 발견되는 어떤 패턴은 관객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은주 자신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읽고 선택하며, 작품마다 변신하고 있고, 유사한 역할을 피한다고 했다. 역할들이 처한 상황은 흡사할지 몰라도, 그녀는 그 캐릭터들에서 각자 다른 감성을 발견한 셈이다. 사실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장르적으로도 꽤나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데뷔작인 ‘송어’가



스릴러 드라마였다면, ‘오! 수정’은 독특한 구성의 로맨스였고 ‘번지점프를 하다’는 판타지 멜로였다. ‘연애소설’은 순정 멜로였고 ‘하얀방’(2002, 임창재 감독)은 호러였으며 ‘하늘정원’은 최루성 멜로였다. 전쟁 드라마인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 감독), 로맨스 드라마인 ‘안녕! 유에프오’, 치정 스릴러인 ‘주홍글씨’까지, 생각해보면 이은주는 작품마다 장르와 캐릭터의 감성을 조금씩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해왔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고정된 이미지가 존재하는 건, 영화의 일부로서 배어드는 무채색의 톤을 지녔기 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그의 자리



그녀가 함께 했던 남자 배우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연기자 이은주의 독특한 점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설경구, 정보석, 문성근, 이병헌, 차태현, 정준호, 안재욱, 장동건, 이범수 그리고 한석규. 20대 초반의 여배우가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의,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배우들과 앙상블을 이루며 상대방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놓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다. 이것은 어떤 여유 같은 것이며, 배우로서 그녀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했다. 당시 같은 세대의 여배우들 중 이런 넓은 쓰임새를 지닌 여배우는 오직 이은주뿐이었고, 지금까지 살펴봐도 그녀처럼 ‘유용’했던 여배우는 없다.



오! 수정




그렇다면 그녀에게 무채색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없었을까? 제목이 상징하듯 ‘주홍글씨’는 그녀가 강렬한 색상과 채도를 지니려했던 첫 영화가 아닐까 싶다.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렸던 그녀가 처음으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발산하는 영화인 ‘주홍글씨’. ‘운명’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파국’에 가까운 종말. 영화 내내 요동치는 질투, 분노, 애증 등이 뒤섞인 복합적 감정. 이런 요소들은 이은주를 사뭇 다르게 만들었고, 그도 자신의 톤을 바꾸기 위해 큰 도전을 했다. 왜 이토록 급격한 변화를 해야 했을까? 언젠가 “나에겐 사춘기가 없었다”고 고백했던 여배우는 비로소 정체성을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은주에게 ‘주홍글씨’는 과거와 이별을 고하려는 절규와도 같았고, 특히 트렁크신은 그 절박함으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유작이 되었다. 배우로서 2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멈춘 것이다.



그럼에도 이은주라는 배우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건, 그녀가 보여주었던 사랑의 모습 때문이다. ‘오! 수정’에선 사랑 앞에서 머뭇거렸다면, ‘번지점프를 하다’에선 영원한 사랑의 믿음을 약속했다. ‘연애소설’에선 순수하고 슬픈 사랑의 히로인이었다면, ‘하늘정원’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안녕! 유에프오’에선 마음을 연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주홍글씨’에서는 사랑의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의 비극과 절망을 보여준다. 이토록 들끓었던 사랑의 감정. 그녀의 죽음 앞에 바쳤던 문근영의 추도사처럼 이은주는 “불꽃 같은 열정을 채우고 간 사람”이었다. 1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한 번 그녀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곳에선 평안하길.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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