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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파르라니 물든 남녘 봄처녀 ‘썸’ 타시네
















벌써 3월. 입춘이 지난 지도 한 달이 넘었는데 여태 웅크리고 있었구나, 달력을 보다 문득 무안해졌습니다. ‘날 풀리면’ ‘봄이 오면’이라는 핑계로 미룬 약속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입니다. 이제 기지개를 켜야 할 때지만 봄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집니다. 요샛말로 하자면 봄과 ‘썸을 타고’ ‘밀당’을 하는 시기랄까요. 달래·냉이로 차려진 식탁, 쇼윈도 마네킹의 얇아진 옷차림, 노란 꽃으로 갈아입은 3월의 달력 사진 등등. 봄을 알리는 징후는 다양한데 맘 놓고 반기기는 쉽지 않네요. 꽃샘추위 탓이겠지요.

매스컴에서는 남녘에 봄이 왔다고 호들갑이지만, 최근 건국대 최영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봄이 시작되는 날(전국 평균)은 3월 11일이라고 하네요. 아직 서울은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입니다. 하여 이번 주 week&은 남도로 떠났습니다. 봄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울과 달리 남도에는 벌써 봄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더군요. 들판은 겨울을 이겨낸 작물들로 파릇파릇했고, 양지 바른 곳에서는 쉽게 봄꽃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도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은 매화와 동백입니다. 엄동설한을 견뎌내며 꽃을 피우지요. 매화는 전남 순천의 금둔사에서, 동백은 강진의 백련사에서 찾았습니다. 금둔사는 납월매(臘月梅), 즉 음력 섣달에 피는 홍매로, 백련사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1500그루의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이미 많이들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더 남쪽으로 달려 진도의 봄동밭과 보리밭, 완도의 감태 갯벌, 경남 남해의 다랑논도 돌아다녔습니다. 홍매와 동백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남도를 물들인 초록도 엄연한 봄의 색이었습니다. 무릎 정도 자란 보리는 바람결에 살랑 살랑 춤을 췄고, 갯벌의 감태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남해 끝자락 다랑논의 마늘과 시금치의 초록빛은 파란 바다색과 잘 어울리더군요.

봄을 맞는 아낙의 분주한 몸짓은 또 어떻고요. 봄동과 시금치를 캐는 바쁜 손놀림에서, 언 손을 녹이는 뜨거운 입김에서, 그럼에도 활짝 웃는 얼굴에서도 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봄은 아름다운 빛이면서 역동적인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남도의 봄은 조금씩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week&이 순천·진도·강진·완도·남해를 헤집고 다녀 다양한 봄의 증거를 찾아왔습니다. 봄을 마중하러 함께 떠나보시지요.


연한 봄동·감태 입맛 당기고, 고운 동백·매화 눈이 시리고
봄내음 물씬한 남도

봄을 찾아 떠난 남도 여행. 경칩을 앞둔 남녘 들판과 갯가에는 어느새 봄이 와있었다.
전남 진도에서, 완도 고금도, 강진, 순천 그리고 경남 남해까지.
무작정 봄의 신호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거창한 여행코스가 완성됐다.
꽃구경이라 불러도 좋고, ‘먹방’ 여행이라 해도 괜찮다.
농어촌 체험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봄이 왔으니 아무렴 어떠랴.


진도 봄동
‘아삭’ 봄을 깨무는 소리

남도 여행을 부추긴 데는 봄동도 한몫했다. ‘들판에 앉아 향긋한 봄동 한입 물면 더없이 행복하리라, 없던 입맛도 되살아나리라’는 생각에 발길을 재촉했다. 진도대교를 건너 군내면에 드니 사방이 봄동으로 연둣빛이다. 봄동은 전남 진도·해남·완도·신안 등지에서 전국의 80%가 생산된다. 일교차가 크고 해풍을 많이 받아 봄동 농사에 제격이다. 봄동은 늦가을 밭에 씨를 뿌려놓으면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여물어진다. 수확은 2~3월에 한다. 봄동밭 할머니가 얼굴 크기만 한 봄동을 들어 보인다.





“이만치 큰 놈이 물도 많이 나오고 달고 맛나지. 된장국도 끓이고 겉절이도 하고. 하이고 침 나오네.” 한입 넣어 본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봄기운이 입안으로 퍼진다. 수분이 많아 김장배추보다 달고 연하다. 할머니들은 겉절이나 쌈으로 먹을 때 봄동이 최고란다. 겉절이도 소금에 절이지 않고 먹기 직전에 썰어서 고춧가루에 살짝 무친다.

봄동 수확은 단순한 노동이다. 누릇누릇한 배추의 겉 이파리를 떼어낸 다음 봄동을 만개한 꽃처럼 보이도록 활짝 열어 차곡차곡 박스에 담으면 된다.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할머니들의 부산한 손놀림은 이어진다. 언뜻 보면 둘러앉아 화투라도 치는 노인정 풍경 같기도 하다. 그만큼 시끌벅적하다. 할머니들의 일당은 6만원 남짓이다.

들판에서 만난 봄은 봄동 이파리의 사각거리는 소리 사이에, 빙 둘러앉은 할머니들의 수다 속에, 노동하는 손끝에 묻은 연초록 어딘가에 살며시 자리잡고 있었다.

●여행정보=진도 군내면사무소 근처 분토리·한사리에 무공해 봄동밭이 수두룩하다. 올해 봄동은 예년에 비해 수요가 줄어 저렴한 편이다. 15㎏ 한 상자에 1만5000~2만2000원. 진도 유통 061-542-1308.





남해 다랭이 마을
무르익은 봄

남해군은 이미 봄이 한창인 듯했다. 산비탈에 층층이 계단을 이룬 밭마다 시금치와 파·마늘로 초록이 무성해서다. 남해에서도 가장 남쪽 끄트머리에 다랑논으로 유명한 가천 다랭이마을이 있다. 설흘산(487m)과 응봉산(472m) 아래 경사지에 100여 층 600여 개의 논과 밭이 바다를 향해 있다. 언덕에서 보면 밭을 매는 농부의 등 뒤로 바다가 겹쳐, 꼭 절벽 끝에서 농사를 짓는 듯하다.

이런 극적인 풍경 덕에 다랭이마을은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수많은 민박집과 카페들이 들어선 지도 오래됐다. 지금도 곳곳이 공사 중이다. 다랑논의 고유한 풍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노파심에 물었더니 손명주 이장(59)이 오해를 풀어줬다.

“보존을 위해 논과 밭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농사짓기 불편한 어르신들이 낡은 집을 개조해 민박을 치게 된 거죠.” 요즘 다랭이마을 주민의 삶은 ‘반농반민박’이 많다.

남해의 다랑논에는 억척스러운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다랭이마을은 예부터 어업을 하지 못했다. 풍부한 갯것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파도가 높아 도저히 방파제를 쌓지 못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석축을 세워 일군 것이 다랑논이다.

지금 다랑논은 마늘·파 등으로 온통 푸릇푸릇하다. 3월 중순까지는 시금치와 파 수확이 한창이다. 관광객이 몰리는 버스정류장 앞엔 오후마다 할머니들이 몰려나와 채소를 판다.

“빨랑 팔아 치우고 밭에 콩이랑 깨랑 심어야지. 5월엔 마늘 캘 거니까 꼭 또 와.”


●여행정보=남해대교를 건너서도 가천 다랭이마을까지는 한 시간가량 걸린다. 한창 수확중인 시금치와 냉이는 한 봉지에 1000~5000원 한다. 민박집은 방 한 개에 항상 5만원이다. 다랭이마을 김효용 사무장 010-4590-4642.





강진 백련사 동백
붉게 물들다

겨울과 봄에 걸쳐 피는 동백은 12월부터 4월까지 오래 볼 수 있다. 한 달가량 늦게 피는 매화보다도 되레 생명이 질기다. 낙화한 동백은 땅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 보통의 꽃과 달리 모가지가 뚝 부러져 꽃송이째 떨어지기 때문에 목 잘린 붉은 빛이 눈 시리도록 처연하다. 남도에선 보통 2월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한다.

전남 강진 백련사에는 거대한 동백숲이 있다. 3㏊에 달하는 숲에 1500그루가 넘는 동백나무가 살고 있다. 숲 전체가 아예 천연기념물 151호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 꼬불꼬불한 300m 비탈길을 따라 동백나무가 한가득하다. 아직 만개하진 않았으나 군데군데 빨갛게 핀 동백꽃이 여행자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비탈길에서 샛길로 빠지면 동백나무 숲 한복판이다. 인적이 드문 이 숲은 꽃을 구경하기에도 좋지만, 동백꽃이 무더기로 떨어진 꽃길을 따라 한갓지게 걷는 맛이 쏠쏠하다. 지난밤 바람이 그랬는지, 비가 그랬는지 이름 없는 부도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동백꽃이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주지 일담 스님이 아쉬운 마음에 한소리한다. “애매한 때에 오셨소. 동백은 눈을 헤치고 피어나는 12월에 볼 게 아니면, 3월 말이 좋소. 그때는 나무고, 흙이고 온통 붉게 물들 테니.”

숲 한편의 등산로를 따라 다산초당으로 내려오는 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 때 드나들었을 그 길을 걸으며 동백을 생각한다. 3월 말의 동백나무 숲에서는 또 얼마나 동백꽃이 흐드러지고 떨어질까. 그 시뻘겋고 고운 것들이.


●여행정보=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인 만큼 드나들 때 나무에 해를 입히지 않아야 한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0.8㎞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 백련사 061-432-0837.





순천 금둔사 홍매
봄의 전령

순천 금전산(679m) 자락의 고즈넉한 절집 금둔사에선 홍매화가 봄의 전령이다. 음력 12월 엄동설한부터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납월 홍매’다. 경남 양산 통도사, 거제시 옛 구조라 분교와 함께 전국에서 맨 먼저 매화가 피는 곳으로 유명하다. 섬진강 매화마을보다 한 달 이상 빨리 핀다. 이상기온으로 섣달을 넘겨 꽃이 피는 해도 있는데 올해는 윤달 때문인지 음력 11월27일인 1월 17일에 첫 꽃망울을 틔웠다.

금둔사 홍매는 주지 지허 스님이 낙안읍성에서 600년 된 거목의 씨를 받아다 1985년에 심은 것들이다. 그 가운데 여섯 그루가 살아남았다. 고작 여섯 그루, 그나마도 듬성듬성 있어 근사한 군락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스님은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가까이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라고 권한다.

“왜 애써 그 추운 날에 꽃을 피우려는지. 납월 홍매는 고행하는 수행자와 닮은 게 많아요. 겨울이 혹독할수록 더 붉고 고운 꽃을 피우죠.” 스님도 꽃에서 한 수 배웠단다.

스님은 이따금 손님을 위해 차(茶)를 준비한다. 몇 안 되는 꽃을 보러 먼길을 온 사람들이 고맙고 안쓰러워, 매화의 가르침을 대신 전하려, 직접 재배한 고급 차를 내준다. 금둔사 홍매는 보통 3월까지 산사를 지킨다. 지금은 해우소와 설선당(說禪堂) 앞 매화가 한창이다. 해우소 앞에서 관광객들의 매화 향 찬양이 들려왔다.

“매화 향은 새벽에 가장 은은하게 퍼지죠.”

“꽃잎을 입에 넣고 씹고 있으면 향내가 몇 시간이나 간다니까요. 그 고운 봄 냄새가.”


●여행정보=금둔사는 순천 낙안읍성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금둔사 앞을 오가는 시내버스(15번·61번)도 있다. 경내에는 금둔사지 삼층석탑(보물 945호), 금둔사지 석불비상(보물 946호)이 있다. 금둔사 061-755-3809.





완도 고금도 감태
짭조름한 봄내

완도는 예부터 ‘돈 섬’이라 불렸다. 줄기차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김·미역과 같은 해산물이 풍부하게 올라와서다. 완도 고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고금도 갯마을 내동마을에서는 지금 감태 채취가 한창이다. 물이 빠지면 뻘을 연초록빛으로 물들이는 게 감태다.

감태는 봄철 푸성귀를 뜯듯 작은 힘으로도 쉽게 딸려 나온다. 문제는 추위다. 채취 도구라고 해봐야 방수복·장화·장갑 따위가 전부. 감태는 뿌리는 남기고 끄트머리만 거둬 올린다. 단순하지만 손수 해야만 하는 예민한 작업이다. 2시간 넘게 구부린 채 개펄을 헤집고 다녀야 고무 대야가 가득 찬다. 손발은 꽁꽁 얼어붙는다. 초봄의 개펄에 몸을 부대껴본 사람은 감히 연초록의 감태밭을 두고 예쁘다고 말하지 못한다. 30㎏에 달하는 대야를 끌고 나오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그래도 밝다.

감태는 영양이 풍부하고 오염되지 않은 개펄에서만 자란다. 마을 토박이 김병호(80) 할아버지가 방금 건진 감태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뻘에는 농약을 못 치지, 이 짭조름한 게 보약이야.”

감태는 신선할 때 바로 무쳐 먹어야 제 맛이다. 뻘에서 올리고 나서 바로 바닷물과 민물로 두 차례 헹궈낸다. 그리고 소금으로 간을 맞춰 절인 고추를 송송 썰어 무치면 감태 김치가 된다. 감태는 1~2월이 제철로 꼽힌다. 3월 이후에는 잎이 빳빳해져 말려야 먹기 좋다. 봄이 무르익으면 갯마을 집집마다 감태가 빨래처럼 널린다. 고금도의 초봄은 이래저래 연초록빛이다.

●여행정보=고금도 감태 채취는 3월 중순이면 마무리된다. 대신 고금면 일대 식당에서 싱싱한 감태김치를 맛볼 수 있다. 갓 담근 감태 김치는 전국 각지로도 배달해준다. 9㎏짜리 1박스가 약 3만원. 내동마을 방금식 이장 010-3618-0487.


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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