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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 남로당 준동, 반란 … 진압 후 대대적 좌익 소탕

48년 10월 19일 육군 14연대가 일으킨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국군토벌대. [중앙포토]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육군 제14연대에 비상나팔이 울려퍼졌다. 지창수 상사의 주동으로 부대원 40여 명이 무기고를 장악하고 전 병력을 연병장으로 집합시켰다. 날이 밝으면 폭동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1개 대대가 출동할 예정이었다. 반란군은 “제주 출동 거부, 경찰 타도, 남북 통일”을 주장했다. 여순사건으로 일컬어지는 14연대 반란 사건의 시작이었다. 반란군은 여수 읍내로 진격해 20일 새벽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 오후엔 순천을 점령하고 다음날 남원·구례·보성까지 진출했다.



숙군 계기된 여순사건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반란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진압군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돼 있었다. 백선엽 대령은 그때 처음 만난 박 소령의 인상을 회고록에 묘사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늘 말 없이 앉아 있기 일쑤였고 과묵함이 지나쳐 때로는 뭔가 불만 있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한구석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진압군은 27일 여수를 탈환했다.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만 수천 명에 달했다. 14연대 반란사건은 군 내 탄탄한 조직망을 갖췄던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히는 계기가 된다. 정부는 그해 12월 1일자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군에선 대대적인 숙군(肅軍), 즉 좌익 소탕 작업이 벌어졌다.



 남로당 주요 인사는 대부분 검거됐고, 남로당 조직은 무너지고 말았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평한다. “숙군 작업을 통해 남로당 세력을 거의 괴멸시켰어. 그래서 북이 남침했을 때 남쪽에서 게릴라들이 일어나지 못했어. 덕분에 우리가 방어하기가 용이했지.”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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