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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대박? 남북 잘 아는 고려인 왜 활용하지 않나

왼쪽부터 `모스크바 10진’ 생존자 김종훈, 명 드미트리 카자흐 국립대 교수, 한국어 대모 최미옥 교장.


“조국이 부르면 당장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 말이다.” 말끝마다 ‘말이다’를 후렴구처럼 붙이는 사투리가 마음의 결구처럼 들린다. 김종훈(83) 전 고려일보 기자 겸 카자흐스탄 국립영화제작소 촬영감독은 “한반도의 성과는 내 성과이고 불행은 내 아픔이며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말이다”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3인 인터뷰
'모스크바 10진' 생존자 김종훈
북 숙청 비판하다 소련에 발묶여
대북정책에 미·중 잘 활용해야
명 드미트리 카자흐 국립대 교수
김정일 이웃 중학교 다니다 망명
북 기득권층 다 사라져야 새 바람
한국어 대모 최미옥 교장
고려인 떳떳하기 위해 우리말 연구
남북, 언어 더 달라지기 전에 모여야



 지난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난 김씨는 고려인 사회에서 큰 어른으로 받드는 마지막 정치적 망명객이다. 1957년 이른바 ‘모스크바 10진’의 한 사람으로 소련에 망명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온 10명 유학생 가운데 한 명이다. ‘모스크바 10진’은 북한이 소련으로 유학 보낸 인재 중 북한의 소련파 숙청 뒤 김일성을 비판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진실한 사람’을 일컫는다. 2006년 고려일보 주필을 지낸 양원식 선생, 2013년 공훈 음악가 정추 선생 타계 뒤 지금은 김씨와 최국인씨 두 사람이 남아 ‘잊혀진 고려인’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일본 공민권, 북조선 공민권, 무국적, 소련 공민권, 카자흐스탄 공민권을 지니고 살아온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이었다”며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 낙도면 삼천리가 그립다고 했다.



 “이제 후손에게 우리가 어떤 나라를 남겨줄 것인가,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파란만장을 겪어온 내 늙은 눈에는 앞을 내다보는 큰 사람도 애국하는 사람도 한국에 없다. 한국은 대북정책에서 미국과 중국을 활용해서 의도하는 대로 이끌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것을 못한다.”



 그는 “대한민국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 대북방송이니 풍선 띄우는 것도 별 소용없어. 어떻게 하면 선전 효과가 있나 연구하고 전략을 짜야지. 왜 우리 같이 남북을 잘 아는 사람들을 활용하지 않는가.”



 명 드미트리(74·알파라비 카자흐 국립대 한국학과) 교수는 고려인 사회에서 ‘인텔리겐차’(지식인)로 통하는 정치철학자다. 한국 이름은 명철우로 선친이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러시아어학과장을 지낸 명월봉 교수다. “평양에서 보낸 날들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그는 자신이 다니던 6번 특별중학교 건너편 1번 특별중학교 재학생이던 김정일을 여러 번 보았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김일성 광장에 모여서 2~3시간씩 ‘미제국주의는 남조선에서 물러나라’ 같은 구호를 외치던 게 생각나요. 러시아어, 조선어와 조선지리, 력사(역사)를 배웠죠.”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서 독자노선을 표하고 국내 정적(政敵)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김일성 독재를 피해 반체제 인사였던 명월봉 교수 가족은 59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명 드리트리 교수는 그곳에서 3년 군 복무를 한 뒤 카자흐 국립대 철학부를 나와 정치학 박사를 땄다.



 “막스 레닌주의를 전공했지만 자연스럽게 한국 관계학에 관심이 갔어요. 고려인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1980년대 중반까지 고려인 사회에서는 북한이 최고였어요. 하지만 88 서울올림픽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죠.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다자외교가 벌어지던 시기였고요. 비로소 한국이 그들 눈에 들어온 겁니다.”



 명 교수는 “휴전이 선포되고 평양을 떠나기 전, ‘좀 쉬어 힘 가지고 또 하자’ ‘2년 뒤 싸움으로 통일하자’ 이런 구호가 난무했다”고 돌아봤다. “그분들(군부세력), 김일성 김정일 시대의 기득권 세력이 다 나가야 한반도에 새 바람이 불 것”이라고 말했다. 현 권력 장악자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들어와야 통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독일과 다르고, 베트남과도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독일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장벽이 무너지지도 않을 겁니다. 평화통일이란 대전제는 분명하죠. 하지만 공장을 열고, 천천히 같이 일하면서 융화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 대신 북한 인력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말은 통하지 않습니까.”



 최미옥(73) 고려주말한글학교 교장은 고려인들 사이에 ‘한국어 대모’로 불린다. 사할린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뒤 ‘레닌 기치’ 신문기자로 일한 10년을 빼고는 지금까지 한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1991년 알마티에 한국교육원을 세울 때 기초를 놓았고, 알파라비 카자흐 국립대 한국학과 학생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한국어 전문가로 거듭난다. “나는 일생이 교사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무엇이 그를 교사로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징용 간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사할린에서 학교에 다니던 언니가 어느 날 얼굴에 검은 잉크를 줄줄 흘리며 돌아왔어요. 일본인 교사가 한국어를 쓴다며 급우들이 보는 가운데 세워놓고 펜에 묻힌 잉크를 얼굴에 그었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 글에 아무도 관심 없고 가르치는 곳도 없을 때 나는 교사일 수밖에 없었어요. 난 고려 사람이라고 떳떳하려면 말을 알고 글을 쓸 줄 알아야죠.”



 ‘레닌 기치’에서 일할 때, 모스크바에서 검열한 뒤 지령이 떨어지면 밤을 세워서라도 판을 바꿔야 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남과 북의 말과 글이 더 달라지기 전에 한 언어 아래 모이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그게 평생 한국어 교사의 소원이라고 눈을 껌벅였다.



알마티(카자흐스탄)=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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