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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몽촌토성에서 본 한성백제의 꿈


필자가 사는 아파트가 올림픽 공원 근처에 있어 산책 나가는 기회가 많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곰말’이었다고 안내되어 있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곳이 풍납성과 함께 고대 백제의 중심이 되는 위례성(palace)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풍납성과 몽촌성을 위례성이라 하였고 나중에 주변 지역을 포함하여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성은 성벽(都城)이 아니고 한강변의 도시(city of Han river)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금의 송파구 전체와 강남구 강동구 일부에 해당된다.

위례(慰禮)라는 말은 ‘크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한자는 발음을 위한 표기이므로 의미는 없다. 아리수(水)의 ‘아리’와 ‘위례’는 같은 뜻이 된다. 아리수는 ‘큰 강’ 즉 한강의 고어이다.
백제는 압록강 부근의 부여족이 남하하여 세운 왕국이다. 지금은 일실된 백제서기에 기록된 설화에 의하면 강을 다스리는 하백(河伯 압록강의 신)의 딸 유화(柳花)가 하늘을 다스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결혼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나중에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 동명성왕이다.

주몽은 동부여에서 성장 결혼하여 첫 아들 유리를 낳았다. 그러나 주몽의 인기가 높아 이에 불안을 느낀 동부여 왕자들의 시기로 주몽은 졸본부여로 쫓겨 온다. 주몽을 알아 본 졸본부여의 왕은 자신의 세 딸 중 둘 째인 소서노와 정략결혼을 시키고 고구려의 건국을 도와준다. 소서노는 주몽과의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둔다.
소서노는 자신이 낳은 아들 비류가 태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주몽은 동부여에서 데리고 온 장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실망한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도착한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負兒岳 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고 도읍지를 찾는다. 신하들은 남한산과 한강과의 사이의 지역(지금의 송파구)을 내려다보고, 북으로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남한산 522m)에 의지하며, 남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 있고, 서쪽에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 쉽게 얻기 어려운 천험의 지세라고 도읍지로 추천한다. 그러나 비류는 해안가인 미추홀(인천)을 고집한다. 온조는 미추홀이 습하고 염분이 많아 농사에 어려워 신하들의 추천에 따른다.
온조는 자신을 따라 온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건국, 십제(十濟)라고 부른다. 이에 비류는 십제를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자살한다. 비류의 신하들이 온조에 귀순하자 온조는 크게 기뻐하고 ‘백성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百姓濟海樂從)’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쳐 불렀다.

초기 백제는 발달된 철기로 인근의 원주민 마한 세력을 정복한 후 북성(北城)인 풍납성에 이어서 남성(南城)인 몽촌성을 건립한다. 토성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축성법을 도입하여 판축(版築)기법과 부엽(敷葉)공법으로 흙을 다지고 나뭇가지와 잎 등을 깔아 만든 당시로는 최신식 공법의 성이다.
한성 백제 시기 가장 걸출한 왕은 근초고왕이다.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있다면 백제에는 근초고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성기 백제의 상징인 근초고왕은 북으로는 한사군의 대방군과 낙랑군 영토를 흡수하고 남으로는 마한을 복속시켜 현재의 전라남도를 모두 정복한다. 그리고 해양으로도 세력을 펼쳐 일본의 규슈, 중국의 산동성과 요서지역에 진출 이른 바 ‘글로벌 백제’의 이름을 떨친다.
근초고왕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를 일본에 파견 말(馬)을 이용하는 기술과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한다. 일본에서 발견된 칠지도(七支刀)는 그 용도가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 있지만 학자들은 백제를 본국 줄기로 하고 백제에서 뻗어 나간 동아시아의 6개의 분국(백제인 진출기지)가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침입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평양성 지역을 백제 영토로 만든다.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대왕은 북방 정벌로 백제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없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백제 공략에 나섰다. 위협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 장수왕은 475년 위례성 건너 아차산에 진지를 구축하자 백제의 개로왕은 태자인 동생(후에 문주왕)을 신라에 파견 원군을 요청한다.

문주왕이 신라의 원군과 함께 위례성에 도착하였을 때 위례성은 장수왕에게 유린되어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로 7일 밤낮으로 북성(풍납성)을 공격하였고 남성(몽촌성)에 있던 개로왕은 왕비와 함께 붙잡혀 살해되었다.
문주왕은 위례성을 포기하고 신라에 가까우면서 장수왕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금강 상류 곰나루 웅진으로 천도한다. 웅진은 고려 때 현지의 산세가 공(公)자와 닮았다고 공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장수왕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 남한강 상류의 충주 땅을 밟고 충주(중원)고구려비를 세워 새로운 영토의 경계로 삼는다.

백제의 웅진 시기는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까지 5대왕 63년(475-538)으로 끝난다. 백제의 중흥의 왕인 성왕은 국가 발전을 위해 내륙의 웅진에서 바다가 가까운 금강 하류 사비성(조선조에 부여로 개명)으로 천도하고 국가이름을 남부여로 바꾼다. 551년 성왕은 신라와 함께 선조의 땅인 한성을 고구려로부터 일시 탈환하나 2년 만에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빼앗긴다.
660년 백제의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사비성 백제는 122년(538-660)으로 끝난다. 사비성은 해양진출에는 유리하지만 바다를 건너 금강을 올라 온 소정방의 당군(唐軍)을 방어하기에는 취약하였다.

한성백제는 493년간으로 전체 백제 왕조 678년의 73%이며 31명의 국왕 중 21명이 한성백제 시기의 국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성백제를 잘 모른다. 백제하면 웅진 또는 사비성 백제를 생각하고 공주와 부여로 몰려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신라의 관점에서 역사서를 기술, 삼천궁녀 등 백제 패망 당시 역사에 중점을 두고 백제의 전성기였던 한성백제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성하면 지금의 서울을 생각하지만 조선조 서울은 한성이라기보다 한양(漢陽 한강의 북쪽 도시)이다. 지금 종로구 중심의 한양과 송파구 중심의 한성과는 거리와 입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리지널 한성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라고 생각된다.
‘흩어진 겨레의 힘을 한데 모우고, 동서로 갈라진 세계를 하나가되게 한’ 서울 올림픽이 송파구에서 개최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근초고왕의 칠지도는 7개의 가지만 있는데 올림픽 광장에는 참가국 160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백제가 동아시아를 품었다면 서울 올림픽은 전 세계를 안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한성 백제 시대의 지명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엿 볼 수 있다. 위례성의 북성지인 풍납은 그 길죽한 모습으로 사성(蛇城)으로 불리었는데 사람들은 ‘뱀(배암)들이’로 불렀고 그것이 다시 ‘바람들이’로 와전되어 풍납(風納)이 되었다고 한다.
남성지인 몽촌(夢村)은 옛 지도에는 몽촌리인데 당시 사람들은 ‘곰말(곰마을)‘로 불렀다. ‘곰말’이 ‘꿈마을’이 되어 ‘몽촌리’가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곳을 떠나 곰나루(웅진)로 간 백제를 그리워하여 곰말(웅촌)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멋대로 추측해 본다.
석촌동은 ‘돌마을’인데 이 돌이 바로 적석총(돌무지무덤)으로 된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고분군에서 나왔다. 가락동과 방이동의 고분군은 일반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군이 이 돌로 진지를 구축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인조대왕의 항복을 받아 냈다. 일제 강점시기에 100개 가까운 적석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탄천(炭川)의 백사장은 군사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훈련 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데 남은 숯(炭)은 강물을 정화시키는데 사용하여 ‘숯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국판 ‘폼페이’라고 흥분했다는 풍납토성 발굴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서울 올림픽 개최로 몽촌토성을 정비할 때 위례성을 복원보다 올림픽 경기장과 체육시설 마련이 급하였기에 일반인에게는 올림픽 공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소나무를 로고로 쓰고 ‘맑은 공기 푸르른 세상’을 구호로 하는 송파구는 1970년대 도시 개발과 함께 조선조의 ‘동잠실’이었던 거대한 뽕나무섬(蠶島)의 남쪽에 흐르는 송파강을 매립하여 만든 지역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은 확장되어 한강 본류가 되고 뽕나무섬은 육지와 연결되어 올림픽 주경기장과 수많은 아파트 숲이 들어서 있다.

송파구는 2013년부터 관광특구로 지정 되어 있다. 오늘 날 관광은 인문관광이 중심으로 역사의 스토리를 입혀야 국내외 관광객이 열광한다.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을 생각한다면 송파구는 한성백제의 유적지를 일부라도 복원하고 한성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는 행사 주관을 권하고 싶다. 2012년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도 좋은 명소가 될 것이다.
평양성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근초고왕의 개선행사, 침류왕 때 동진(東晉)의 고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하는 행사, 일본으로 떠나는 아직기와 왕인 박사의 송별행사 등을 재현한다면 우리 국민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의 큰 관심도 끌어 낼 것이다.

국내외 관광객이 롯데 월드타워 몰에서 쇼핑을 하고 한성백제의 문화행사를 경험한다면 좋은 관광 상품이 될 것 같다. 마침 지하철 8호선은 한성백제의 전 지역을 운행하고 있어 한성백제를 둘러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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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