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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혁명·사랑 배우려 했지" … 5·16으로 세상 뒤집어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고 그 진실 합작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해 10월부터 `김종필 증언록`을 위한 인터뷰를 했다. 그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반세기 먼 세월이 어제 같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불편하다. 왼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조문규 기자]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김종필 전 총리. 오른쪽은 아들 김진. [전영기 기자]
JP(김종필)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유골함이 무덤에 들어간다. 외아들(김진)이 멈추게 한다. JP는 한쪽 손으로 유골함을 어루만진다. 눈물이 뺨을 적신다. 포근한 겨울. 그의 안경 너머는 언덕 위다. 백로가 날갯짓을 한다.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하관식이다.

현대사 연출가 JP … 5·16에서 자비명(自碑銘)까지
정치 9단? 권모술수에 능한 거지 … 풍운아는 '불꽃'이야
후세 위해 '역사의 비곡' 육성증언



 유택(幽宅, 묘소)은 지난해 JP가 마련했다. “내가 먼저 가려고 준비했는데···.” 그 언덕에 다섯 형제들도 잠들어 있다. 고향인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그 선산에 꾸민 가족묘원이다.



 지난해 8월 그는 유택을 찾았다. 옆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좌청룡·우백호 그런 명당엔 해당이 안 돼. 그냥 편안히 드러누울 데 만들어 놓은 거지.” 그는 묘비명을 썼다. 그 121자는 인생관을 압축한다. “晩年(만년)에 이르러 ‘年 九十而知 八十九非’(연 구십이지 팔십구비)라고 嘆(탄)하며 數多(수다)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소이부답) 하던 者(자).”-





JP는 비문을 풀어 나에게 읽어 준다. “나이 구십 되어 돌아보니 여든아홉 해를 헛되게 살았다고 한탄하는데, 그래도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는 많은 물음에 대해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 자.”- 엷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서린다. 2015년 1월 7일(1926년생) 그는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았다.



 김종필의 등장은 혜성 같았다. 54년 전 세상을 뒤집었다. 5·16에 대한 그의 자평은 명쾌하다.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들었다.” 그는 현대사의 연출가였다. 국회의원 9선, 정당 총재 네 번, 두 차례 국무총리. 대통령은 못했지만 전무후무한 경력이다.



 그런 삶이 89년의 헛됨을 따진다. ‘정치 허업(虛業)’을 말한다. 그것은 절제인가 회한인가. 달관인가 미련인가. 반전(反轉)의 언어다. 지독한 역설이다. 하지만 절묘함의 여운은 길다. 그 허업은 단지 정치 무상이 아니다. 그 말 속엔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희생”(JP 표현)이 깔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끈 군대는 나라를 장악했다. ‘혁명 취지문’이 발표됐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궐기문의 첫 구절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시작하는 6개 항 공약이 이어진다. 격문의 집필자는 JP다.



박보균 대기자(오른쪽)가 김종필 전 총리와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권혁재 사진전문 기자]
 - 은인자중이란 단어, 거사의 극적 분위기를 넣으셨는데요.



 “내가 쓴 표현이지, 그런 군부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당찬 호기다. 그때 그는 35세, 예비역 육군 중령이다. 석 달 전에 예편당했다. 정군(整軍)운동 때문이다. (궐기문을 읽었던 KBS 아나운서 박종세는 “그때 JP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휘자 같았다”고 회상한다.)



 - 5·16의 설계·실천자이셨는데요.



 “혁명의 많은 면에 내 생각이 들어 있지. 하지만 한계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이 부족한 것을 메워서 이끌어 가고, 그리고 상부상조해서 끌고 간 거야.”



 - 그때 어떤 심경이었나요.



 “목숨을 걸었지.” 그의 시는 결의를 압축한다. “장미의 오월/순백의 꽃빛깔 거짓 없듯/애국의 충정을 뭉쳐/하늘에 걸던/피의 서약….”(5·16 9주년에 씀)



1971년 5월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가 8대 총선 투표 후 자택에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중앙포토]
 그는 거사의 의미를 회고한다. “4·19(60년)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렇지 못했어.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거였어.”



 박정희·김종필의 군 동원 규모는 작았다. 전광석화는 행운을 낚는다. 무혈(無血)로 나라를 평정했다. “국민이건 군이건 대부분이 나라의 결정적 전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이지.” 5·16은 반민주·쿠데타로 교과서에 규정돼 있다.



 - 5·16 역사 논쟁은 그치지 않는데요.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말이야. 5·16은 우리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 변화를 이끌고 실적을 남겼어. 그게 바로 혁명이야.”



 1960년 민주당 집권(내각제) 시절 그는 장면 총리를 찾아갔다. “군대를 정화할 사람을 국방장관에 임명해 달라고 갔지, 만나지는 못했어.”



 - 그 장면은 하극상 아닙니까.



 “중령이 총리를 못 만날 이유가 뭐 있어. 나폴레옹은 대위에서 영관을 거치지 않고 장군이 되고 황제(35세)가 되지 않았는가.”



 나폴레옹의 ‘혁명과 사랑’-. 그것은 JP의 조숙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중학 시절에 세계 위인전을 거의 다 읽었어. 돋보이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야. 그래서 아주 좋아했지, 사랑도 흉내를 내려다가 잘 안 됐지만.” 하지만 JP식 아내 사랑은 잔잔한 감동이다.



 5·16은 세상의 언어를 바꿨다. “나는 겨레의 가슴에 새로운 도전과 분발의 불꽃을 점화시키려고 했어.” 근대화, 민족중흥, 자조, 자주국방은 시대의 지배언어가 된다. 주한미군은 5·16을 저지하려 했다.



 - 미국은 5·16 주연들의 정체를 의심했지요.



 “혁명그룹 배후에 있는 내가 다크호스로 보였겠지. 미국은 나를 반미주의자, 급진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봤을 거야.” 그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를 만난다. ‘5·16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1963년 12월 4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 공화당의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김종필의 삶은 풍운(風雲)이다. 영욕(榮辱)의 교차는 가파르다. “내가 태어날 때 천둥과 벼락이 요란하게 쳤대.” 그의 호는 운정(雲庭, 구름 속 뜰)이다. 그는 서울대 사대에 다녔다. “부농의 아들이어서 어려움을 몰랐어. 아버지가 작고하신 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할 수 없었어. 새 출발의 신고(辛苦)를 겪겠다고 결심했지.” 1948년 7월 그는 사병으로 자원입대한다. “야만적인 일제식 기합은 내가 바란 단련이 아니었어.” 일주일 만에 탈영. 다시 하사관으로 군에 갔다. 거기서 육사(8기)에 입교, 49년 5월 졸업(소위)한다. 우등생 JP는 육본 정보국으로 뽑혀 갔다. 박정희는 정보국의 작전정보실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소령 시절(49년, 32세) 좌익 빨갱이로 몰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어. 그 후 감형과 동시에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 정보국에 근무하셨지.” 박정희의 과묵과 치밀함-. JP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거야.”



 박정희와 JP 팀은 6·25 남침을 정확히 예측한다. 군 수뇌부는 그것을 묵살한다. JP는 박정희의 조카딸(박영옥)과 결혼한다(51년 2월).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이다. 처삼촌과 조카사위는 현대사의 장정(長征)에 동행한다. 그는 애틋한 부부애를 기억해왔다.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 사모님을 빼고 누가 가장 생각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야. 나는 18년간 박 대통령을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해 드렸어.” JP는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던 인물이다. 많은 순간 그 진실을 합작하기도 했다. 5·16 나흘 뒤 그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한다. 정보부장 JP는 국가 개조의 기획·실천자였다. “혁명과업을 완수, 뒷받침하기 위한 거였어.” JP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중장)을 체포한다.



 - 박정희 소장에게 그 일을 사전보고하지 않았다면서요.



 “혁명 초기에 박 대통령은 힘든 일이 생기면 그만두고 군대로 돌아간다고 했어.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약한 마음을 강하게 만들려고 뒷받침했어. 장도영 체포도 그 때문이야. 독단적인 결행이었지.” 소장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을 맡는다. 현대사 전면에 등장한다.



 “나 그만두고 싶다.”- 박정희의 유약한 면모는 낯설다. 유신 시절의 권력 집착에 비하면 뜻밖이다. JP의 회고는 긴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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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다. JP는 그것을 “혁명의 연장선”이라고 정리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욕먹기 싫다는 거지. 혁명할 때 목숨을 건 마음가짐으로 내가 나섰지.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대륙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야.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 대서양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거야.” 역사의 악역(惡役). 그 자임과 배포는 역사 기록을 갈아치운다. ‘김종필-오히라’ 담판(1962년 11월)은 그 행적의 절정이다. 굴욕외교 논쟁도 커진다.



 JP는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다. 창당 발기 선언문을 썼다. 대중을 격발시킬 단어를 골랐다. “이 땅의 민족은 새 질서를 요구한다. 새 질서는 새 힘의 소유자만이 이룩할 수 있다. 민족의 정기와 대의(大義)를 위해 세운 민주공화당의 깃발 아래 모이자.” JP는 “내 문장에 힘이 있었지”라고 한다.



 거센 시련이 찾아왔다. 최고회의 장군들은 JP 독주에 반발했다. 5·16 주체세력은 분열, 대립했다. 워커힐·증권·빠찡꼬·새나라 자동차 등 4대 의혹사건이 터진다. 그는 억울해한다. 하지만 공격과 비난은 쏟아진다. 그는 버티지 못한다.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외국에 나간다.(1차 외유)



 그 후 박정희는 “공화당 등에 올라탄다.”(JP 표현) 63년 10월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다. JP는 그 직후 귀국한다. 64년 한·일 국교 반대 시위는 거셌다.(6·3 계엄령 선포) 그는 다시 후퇴한다.(2차 외유) JP는 월남 파병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었어. 우리 역사에 드문 경험이지.”- 그는 공화당 당 의장으로 복귀한다(65년 12월). 공화당 4인 체제는 JP를 견제한다. 그 핵심은 거물 민간정치인 김성곤(쌍룡그룹 창업자)이다.



 - 그때도 권력 무상을 맛보셨는데요.



 “김성곤은 내가 정계로 이끌었어. 그런데 나를 맹렬히 견제했지.” 4인 체제는 TK 세력의 원류다. 김종필은 다시 정계를 떠난다.



 69년은 3선 개헌 정국이었다. “반대 의견을 말했어. 5·16 혁명한 것이 자유민주주의 하자고 한 것 아닙니까 했어.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내 손을 잡더니 나와 같이 죽자고 혁명했지, 끝까지 나 좀 도와달라고 해.” JP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반세기 먼 세월이 어제 같다.



 후임 정보부장들은 JP를 감시한다. 김재춘에 이어 김형욱은 철저했다. 이후락의 신임과 영향력은 JP를 압도한다.



- 박 대통령의 권력 관리가 노련해졌네요.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 분할 통치)이야. 박 대통령이 그것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묘하게 써먹으셨어.”



 71년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격돌이다. 대선 후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45세)로 임명한다. 장수총리(71년 6월~75년 12월)였다. 격랑의 세월이었다. 71년 공화당 항명 파동(김성곤·길재호 퇴장)→72년 7·4 남북 공동선언, 10월 유신→73년 윤필용 사건(군부 재편), 김대중 납치(이후락 퇴진)→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박종규 사퇴)이 이어진다. 권력 판도는 재구성됐다.



 JP는 유신 작업에 소외됐다. 박정희 친정(親政) 체제가 완성됐다. 긴급조치의 유신독재는 사나웠다. 부마사태 저항에 이어 10·26. 박정희 시대는 마감한다. “김재규가 총을 꺼낸 건 충성경쟁에서 차지철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영민하던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사고력이 떨어졌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야.” 박정희의 비극은 인사 실패에서 비롯된다. 용인술의 영민함은 흐릿해졌다. JP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교만과 중정부장 김재규의 광기를 증언한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무기력했다. 18년 박정희 시대의 인물은 다양하다. 이들 3인은 지모와 지혜, 역량에서 가장 떨어졌다.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했어”-. JP는 그 말을 반복한다. 막전과 막후가 미묘하게 갈린다. 그 말에 박정희에 대한 충정이 넘친다. 뒤쪽에는 비감이 어린다. 회한 같은 절규가 담긴 듯하다. “내가 권력을 행사한 것은 중앙정보부 만들어 혁명정부에 걸리적거리는 것 치워주고 뒷바라지했던 짧은 기간뿐이야.” 그는 여러 차례 좌절했다. 후계자로 전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만을 항명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10·26은 권력을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공화당 총재를 맡았다.



 - 전두환의 신군부(4년제 정규육사 출신)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박 대통령은 5·16 후 처음부터 내가 군 쪽에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했어.”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신군부는 JP의 영향권 밖이다. 그것은 JP의 권력 후계 행보에 결정적인 취약점이었다.



 80년 민주화의 ‘서울의 봄’이 왔다. 그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을 말했다. 12·12는 신군부의 선제공세였다. 신군부는 JP와 김영삼(YS)·김대중(DJ)을 기습했다.(5·17) JP는 ‘부패정치인’으로 퇴출됐다. “전두환은 나의 꿈을 뺏어갔어.” 그의 얼굴에 분노가 인다.



 - 신군부에 당한 건 권력 의지 부족 때문인가요.



 “나는 권력의 노예가 아니었어.”



 - 10·26 후 정국 대응을 할 때 이상적인 접근을 하신 건 아니신지요.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야.”



 김종필은 경제를 회상한다. 목소리에 힘이 솟는다. 그는 1차 외유 때(63년 7월) 서독에 간다. 그는 탄광 막장에 내려간다. “현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 광부를 파견해야 한다고 했지.” 영화 ‘국제시장’ 덕수의 삶에 JP의 경제투혼이 있다. 5·16 무렵 1인당 국민소득은 85달러 수준. 경제발전은 눈부셨다. 산업화가 먼저 이뤄졌다. 그것은 민주화의 발판이다. 그의 자비명(自碑銘)에 적힌 ‘무항산(無恒産)·무항심(無恒心)’의 성취다.



 87년 JP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대선은 노태우와 3김(YS·DJ·JP)의 격돌이다. 김종필은 가장 약세였다. 그의 야망 속에 대권은 멀어졌다. “80년대 초반 노태우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지. 2인자는 1인자 옆을 떠나지 말라고 했어.” 노태우는 정상에 올랐다.





88년 3김 시대가 열렸다. 정치 9단들은 ‘가능성의 예술’로 정치를 파악했다. 기량과 경륜은 탁월했다. 폐해도 있었다. 지역주의, 불투명한 정치자금, 제왕적 정당 운영이다. 3김은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됐다. JP는 기다림의 도쿠가와를 연상시켰다. 그 무렵 그는 시심(詩心)의 정치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달랐다. 청년 JP는 격정의 오다(織田)를 좋아했다. JP는 “오다의 불꽃같은 과단성이 맘에 들었어. 그게 풍운아야”라고 한다.



 - 정치 9단의 요체는 뭡니까.



 “그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거지.” 쾌활하게 받아넘긴다.



 90년 3당 합당이 있었다. 대통령 노태우와 YS·JP의 결속이다. 내각제는 JP 정치의 정체성이자 생존술이 됐다. 그는 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밀었다. 그 다음엔 김대중을 지원했다.



 - 그것이 JP식 합종연횡(合從連衡)입니까.



 “DJ, YS가 박 대통령에게 당한 것, 그 시절에 고통을 받은 것들을 내가 씻어준다고 했어.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준다고 했어.” JP식 해원(解寃)이다. 반발도 컸다. DJP 제휴를 놓고 ‘변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대통령 YS와 헤어졌다. 자민련을 만들었다. 96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성공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때 그는 다시 국무총리를 맡았다. 그 후 DJ와 결별한다. 2004년 총선 때 다시 재기를 모색한다. ‘정계 은퇴’ 압력도 커졌다. 그는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고 응수했다. 다수 국민은 그것을 ‘노욕’이라며 외면했다. 시도는 실패했다. 43년의 정치 여정은 종료됐다. 그는 “이제 완전히 연소했고 재(災)가 됐다”고 했다.



 그후 10년간 회고록 얘기가 간간이 나왔다. JP는 집필에 부정적이었다. “술회와 회고의 욕구는 누구나 있지. 밖으로 유발하는 것과 속으로 잡아매어 내밀(內謐)로 모아두는 것이 있을 거야. 나는 내밀의 성질을 더 많이 띠고 있었지.” 그의 역정은 개인사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다. 그의 회고는 후학과 후세를 위해 절실하다. 이제 그는 결심을 바꿨다. 주변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그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외운 적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JP의 육성 증언은 가야 할 남은 길로 비쳐진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은 천년을 묵어도 항상 비곡을 간직한다)-. 그가 좋아하는 글귀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그를 우회할 수 없다. JP를 거쳐야 권력의 내면, 정치의 진수를 만난다. 거인 JP는 역사의 비곡(秘曲)을 품고 있다. 어두움과 밝음이 교차한다. 서사시적 장엄함이 있고 서정의 풍취도 있다.





글=박보균 대기자

사진=조문규·전영기·권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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