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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심에 터 닦으니 화합·통합의 새시대 '활짝'

   
▲ ‘동여비고 東輿備考’ 중 개성지방 고지도
장덕호 경기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고려 현종 9년(1018)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기(京畿)’라는 행정 구역이 설정됐고, 그 위치는 개경(開京 : 개성) 주변 지역이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기도의 지리적 위치는 크게 변했다. 개경 주변지역에서 한양주변 지역으로 변한 것이다. 고려시대 한양 주변은 양광도(楊廣道)였다. 오늘날과 비슷하게 경기도의 영역이 형성된 것이 조선 태종때인 1414년이다.
경기도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줄곧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했고, 고려시대에는 왕도(王都)였으며, 조선왕조가 현재의 서울에 도읍을 정한 이후 현재까지 서울을 둘러싸고 있다. 경기도는 한국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지방사회에 불과하지만, 지정학적, 역사적 위치로 인하여 항상 중심부적 역할을 수행했다.

#경기, 역사의 중심으로 서다
경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로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이 대표적인 유적지다. 경기도가 한국사에서 처음 중심 무대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였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확보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으므로, 이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쟁투가 펼쳐져 최종적으로 이곳을 차지한 것은 신라였고, 이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삼국 융합책을 실시했으나 이는 제각기 발전한 삼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는 미흡한 것이었다. 통일 신라의 수도가 동쪽 변두리인 경주에 위치하고 있어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삼국의 화합적 통합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신라 하대에 들어 반신라적 세력이 과거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일어난 것은, 통일 신라의 수도가 지역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열된 후삼국의 통일은 경기도를 근거지로 한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송악(松嶽) 지역 출신인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고 919년에 수도를 송악으로 정하고 후삼국을 재통일한 것이다. 이로써 경기도지역은 골품제의 폐쇄성을 바탕으로 한 고대 신라체제를 극복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통합성을 갖춘 중세적 성격의 고려 국가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경기도는 이때 이후로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경기인-왕건, 새로운 국가를 세우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개성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해상세력, 즉 호족(豪族) 세력이었다. 왕건의 가문은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대대로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이룩했고,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송악일대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해군력과 재력을 갖춘 왕건의 가문과 신라왕실의 후예로 당시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승려 출신의 궁예(弓裔)가 896년 결합함으로써 후고구려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추고 출발할 수 있었다.
고려 왕실의 기원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편년통록 編年通錄’에 의하면 “왕건은 877년 송악의 남쪽에 위치한 자택에서 송악의 호족 왕융(王隆)과 한씨(韓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용모도 훤칠해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었고, 또한 17살 때에는 도선대사(道詵大師)가 다시 송악으로 왕건을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과장이 많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료이긴 하지만 어쨌든 왕건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수려한 용모와 자질, 거기에 좋은 교육을 잘 받았기에 훗날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창할 수 있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음을 밝히고 있다.

   
▲ 강세황 그림(위)의 송도기행첩 중 개성남문과 개성시가와 송악산을 그려져 있다. 최근 개성시가 모습(아래)에서 멀리 송악산이 보인다.
궁예의 휘하가 된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올린다.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지역에서 승리하고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국(泰封國)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태봉의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侍中)에까지 올랐고, 918년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 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등 무장들의 지지로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이후 935년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고려에 항복하였고, 936년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를 복속함으로써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웠다.
경기지역을 기반으로 건국한 고려는 이전의 신라사회와는 다른 성격으로 출발했다. 9세기 이후 신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대국가의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우선 골품제의 붕괴에 따른 족당(族黨)의 출현과 6두품 계층의 반발, 진골(眞骨) 귀족간 왕위쟁탈전의 전개는 전통적인 신라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여기에 해상세력, 군도(群盜)세력 등 지방세력의 등장과 사상적 지주였던 불교의 종파가 교종(敎宗)에서 선종(禪宗)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모두 고대에서 중세사회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나말려초의 사회변동은 우선 집권층의 변동으로부터 당대 지배세력의 변화를 뜻하며, 지방 세력에 불과하였던 호족의 등장은 고려왕조에로의 새로운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경기도 출신인 왕건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건설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사의 중심이 경주에서 경기도로 옮겨지는 계기가 됐다.

#후삼국 통일, 고려 건국의 의의
삼국·통일신라를 거치는 동안 우리 역사에 나타난 정치·사회세력은 중앙무대에서 활동하던 귀족출신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고대사회 신분제도의 최상층을 이루던 세력이었으나, 신라하대에 이르러 고질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의 모순으로 인해 나타나기 시작한 지방세력인 호족들은 개인적인 성향을 지닌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과 결합하면서 도탄에 빠진 국민들에게 새로운 비젼과 국가 모델을 제시해 급기야 왕건을 주축으로 분열되었던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특히 경기도 개성 출신인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중심이 경주에서 경기로 옮겨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려는 이전의 왕조와는 달리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주성을 표방한 국가였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언제나 중국과 북방민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외교적으로 제후국의 위치를 감수해야 했으나 고려는 개국 초부터 황제의 국가를 표방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고려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도 한 몫 하였지만 후삼국 정립기에 외세의 도움없이 스스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주원인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자주성은 훗날 고려가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 지역까지 교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고 있는 서기 943년의 고려시기 왕릉. 현릉은 만수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데 고려 태조 왕건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신혜왕후)도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
고려는 한반도의 중심부인 송악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실질적인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었으며, 고구려 유민, 발해유민, 후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융합정책과 고려 전시기를 통해 꾸준히 추진된 북진정책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뚜렷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한반도 최초의 통일 주역이 된 것이다.
경기인이 주축이 돼 개창한 고려의 문화는 경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변방 지역에서 한반도의 중심으로 이전되면서 500년 고려 문화를 표방하는 다양성, 개방성, 포용성, 역동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인재 발탁을 위해 실시한 과거제도에서 다양성과 개방성을 살필 수 있으며, 해상세력 출신의 왕씨 가문답게 아라비아 지역까지 아우르며 교역하는 모습은 개방성과 역동성으로, 고구려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후삼국의 지방세력들을 포섭하는 모습에서 포용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금속공예 · 나전칠기공예 · 청자 등으로 대표되는 수준 높은 공예 예술은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고려의 문화 정체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경기 문화의 정체성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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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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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