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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북·중 이야기(6)] 김정일과 장쩌민





장쩌민은 위기를 극복하고 총서기에 유임됐지만 덩샤오핑이 여전히 건재한데다 최대 정적인 천시퉁(1930~2013) 베이징시 서기가 그를 견재해 외부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제1차 북핵 위기가 터진 것이지요.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내세운 도광양회(빛을 숨기고 실력을 키워라)의 자세로 일관했어요. 장쩌민은 원칙적 입장을 표명하고 매우 소극적이며 미온적인 자세로 대응합니다. 그의 원칙적인 입장은 3가지였지요. 한반도의 비핵화를 선호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지하며, 북핵 문제는 제재보다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어떤 압력행사에 반대했으며 국제사회의 중재 요청에도 소극적으로 대처했지요. 장쩌민은 저우언라이가 제창한 평화공존 5원칙의 하나인 ‘내정 불간섭’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장쩌민의 이런 입장은 1994년 6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 차원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기권함으로써 나타났지요. 하지만 이 결의안은 찬성 28, 반대 1(리비아), 기권 4(중국, 레바논, 인도, 시리아)로 통과됐어요. 장쩌민은 경제적 실리(미국)와 정치적 실리(북한) 가운데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장쩌민의 이런 태도에 속인 탄 쪽은 1993년에 출범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였지요. 클린턴은 클린턴대로 고민이 많았어요. 클린턴 집권 초기 외교 라인을 보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레이크 국가안보보좌관, 버거 국가안보 부보좌관 등 대서양주의자(Atlanticist) 였지요. 냉전적 이슈였던 군비통제와 군사안보 문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북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어요.



따라서 클린턴은 중국이 나서서 중재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요. 클린턴은 중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핵보유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으로 생각했어요. 착각이었지요. 장쩌민은 국내 입지가 아직 탄탄하지 않은 상황이라 가급적 첨예한 국제 문제에 휘말리기 싫어했어요.



장쩌민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제1차 북핵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이런 입장을 유지했어요. 그는 미국에 협조하는 것보다 주권 존중 및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하면서 북한 편향적 목소리를 내지요. 장쩌민의 태도에 섭섭했던 클린턴은 제네바 합의 이후 집권 초기부터 중국과 마찰을 일으켰던 인권·교역문제의 연계 카드를 다시 꺼냈어요. 클린턴은 최혜국 대우(MFN) 연장,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일시 좌절, 올림픽 연기 등으로 중국에 응수했지요.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북한은 북핵 위기를 더 고조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장쩌민은 조문을 통해 김정일에게 “비할데 없이 침통한 심정으로 마음속 깊은 애도와 가장 정성 어린 위문을 전한다”고 전달했습니다. 제네바 합의 이후 장쩌민은 1995년부터 중단됐던 대북 원조를 재개하면서 국제가격제와 현금결재 대신에 다시 우호가격제로 전환하지요.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후 건국(1948년) 이후 최대의 내우외환을 겪습니다. 내우는 1993년 냉해, 1994년 우박 피해, 1995~1996년 홍수 피해, 1997년 가뭄 피해 등 자연재해였고, 외환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한소·한중 수교 등 국제적 고립이었지요.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북한 조기 붕괴론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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