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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북·중 이야기(5)] 김정일과 장쩌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물러설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중국이 무역거래 방식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중국과 북한은 수교(1949년 10월 6일) 이후 줄곧 국제 가격의 절반 이하로 상대방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우호가격제를 적용했지요.



그런데 중국이 우호가격제 대신에 국제가격제와 현금 결제를 요구한 것이죠. 중국이 탈냉전의 세계사적 변화에 맞게 혈맹 관계에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로 바꾸려는 의도가 담긴 결정이었지요. 중국의 새로운 조치는 가뜩이나 경제난으로 고통 받고 있던 북한에게 뒤통수를 때리는 격이었지요. 정치지도자는 정치적 압박보다 경제적 압박을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김정일은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지요. 혹시나 했던 중국의 ‘배신’이 현실로 드러나자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김정일은 한·중 수교 직후 최고 간부들에게 “러시아와의 관계도 기대할 수 없고 앞으로는 중국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신적 원자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과 현재 만들고 있는 물질적 원자탄과 노동 3호 미사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요.



북한의 핵개발은 북·중 동맹이 약화됨에 따라 유일한 안보적 대안이 됐어요. 따라서 그는 핵개발에 한층 박차를 가했지요. 한국과 1991년 12월 31일 체결한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명기한 한반도 비핵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는 한·중 수교가 체결한 이듬해인 1993년 3월 13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합니다. 이유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핵시설 가운데 핵폐기물 저장소로 추정되는 두 개의 의혹시설에 대해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주권침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북한의 NPT 탈퇴는 제1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제1차 북핵 위기에서 중국은 강 건너 불구경을 했어요. 중국은 제1차 북핵 위기를 전적으로 북한과 미국의 문제로 인식했지요. 게다가 중국은 북한이 핵개발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왜냐하면 중국은 1960년대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해외에서 훈련된 중국인들에게 크게 의존했지만 북한은 그런 인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장쩌민은 과거 마오쩌둥·덩샤오핑 만큼 북한을 몰랐어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갑자기 총서기가 됐지요. 그 이전에도 북한과 인연도 없었어요. 북한과 인연은 총서기가 된 이후 1990년 첫 해외 순방지로 평양에 갔다 오면서 시작됐지요.



그의 관심은 국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다행히 든든한 후원자인 원로들의 지원으로 1992년에 개최한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유임됐지요. 하지만 총서기가 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덩샤오핑이 1992년 2월 남순강화를 통해 대담한 개혁과 적극적인 개방을 촉구했으나 장쩌민은 공개적인 지지표명을 주저했어요. 장쩌민을 지원했던 천윈(1905~1995), 덩리췬(1915~2015) 등 보수 원로들이 경제특구의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이에 분노한 덩샤오핑은 한때 장쩌민의 교체를 심각하게 생각했지요. 덩샤오핑은 총서기 후보로 차오스, 리톄잉, 천시퉁 등을 고려했어요.



위기에 몰린 장쩌민을 구한 사람은 그의 책사 쩡칭홍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었지요. 쩡칭홍의 도움으로 장쩌민은 비록 늦었지만 덩샤오핑의 남순강화에 대한 지지표명을 했고 총서기에 유임될 수 있었어요.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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