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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의 끝 향한 여성의 원초적 본능을 깨우다

영국 출신의 여성 작가 E.L 제임스의 자극적인 성애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2012)가 동명의 영화로 2월 26일 국내 개봉됐다. 사진작가 출신인 여성 감독 샘 테일러-존슨이 메가폰을 잡았고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의 모델로 잘 알려진 제이미 도넌이 젊고 매력적인 억만장자 크리스찬 그레이를, 다코타 존슨이 평범한 여대생 아나스타샤 스틸을 연기했다.

소설가 백영옥이 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열풍의 이면

세계적으로 1억부 이상 팔린 원작의 명성에 힘입어, 이 영화는 13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57개국에서 개봉해 56개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브라질에서는 역대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영화 중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개봉 10일만에 전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4억 달러가 넘는다. 국내에서도 25일 전야 개봉(3회 상영)에 3만9432명이 몰려 역대 청소년 관람불가 외화 멜로 1위인 ‘색, 계’의 정식 개봉 1일 오프닝 기록(4만696명)을 아슬아슬하게 뒤쫓았다.

이 작품이 왜 세계적인 이슈가 된 것일까. 사도마조히즘을 다룬 다른 작품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소설가 백영옥씨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글을 쓰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하루에 할리퀸 로맨스를 예닐곱 권씩 읽어치우던 15살, 직접 로맨스 소설을 쓰겠다고 선포했던 그 해의 여름과 첫 독자였던 친구의 코멘트를 듣던 순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른손 노트에 파란색 모나미 볼펜으로 눌러쓴 내 첫 소설은 찢어졌다. 서로 읽겠다는 반 친구들 때문에 3개로 분리된 노트가 결국 누덕누덕해진 스카치테이프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 후, 나는 인기에 힘입어 줄기차게 소설을 써댔는데, 이름과 나이 장소만 바뀌었을 뿐 모두 첫 번째 소설의 변주들이었다. 중요한 건 그 압도적인 ‘양’이었다.

이 얘길 꺼낸 건, 15살에 소설을 쓸 만큼 내게 작가적인 재능이 있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로맨스물’은 장르 소설이라는 것과 장르에는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장르물이 유독 길고, 비슷한 상황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령 남자 캐릭터의 큰 키, 다부진 몸, 시니컬한 성격, 과거의 상처와 엄청난 부, 그리고 그런 남자에 비해 평범한 여자 주인공은 로맨스 장르의 결함이 아니라 속성이다. 그것은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계약서’ 내미는 색광 남성의 유혹 … ‘엄마들의 포르노’ 별명
크리스찬 그레이. 27세. 세계적인 기업의 수장, 어린 시절 엄마의 친구에게 성적으로 이용당했던 트라우마 이후, 성공을 누군가를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게 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로 스스로를 50가지 다른 빛깔의 그림자로 얼룩졌다고 말한다. ‘크리스찬 그레이’라는 그의 이름은 언뜻 ‘회색빛’과 종교적 뉘앙스를 풍기며 흙탕물처럼 뒤섞여 있고, 실제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영문학도로 철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나스타샤 스틸은 대학신문 기자인 룸메이트를 대신해 억만장자가 된 그를 인터뷰하는데, 그에게 듣는 말은 성공 비결이 아니라 “나를 멀리하는 게 좋아!” 같은 예언적인 말이다. 그레이는 로맨스 따위 관심없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아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를 영문학의 세계로 인도한 토마스 하디의 『테스』 초판본을 선물한다.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서부터 내미는 이 남자는 졸업 선물로 빨간색 아우디를 선물하는 것으로 모자라, 헬기와 비행기를 직접 조종해 여자의 마음을 구름 위로 끌어올린다. 원작이나 영화가 재미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반은 이런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상상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별명을 가진 이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이 1억만 부를 넘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상영을 보이콧 하는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하자마자 전 세계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며 이슈를 만든 이유 말이다. 원작의 독창성은 그레이의 기이하고 유별난 성적 취향 때문에 발생한다.

영화에서 그레이와 아나가 만나는 두 번째 장소는 그녀가 일하는 철물점이고, 그곳에서 그가 구입하는 것은 마스킹 테이프와 케이블 타이, 빨간색 로프다. “딱 연쇄 살인마네요!” 그가 고르는 물건들을 보며 아나가 던지는 농담은 이 영화의 첫 번째 복선인데, 흥미로운 건 그가 채찍과 수갑을 든 색정광이긴 해도 ‘계약서의 규칙을 준수하는 남자’라는 것이다. 위험하지만 그 위험에 한계를 두었기에 선 안에서만큼은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도미넌트(주인)와 서브미시브(하인)’라는 말은 사실 그의 성적 취향을 넘어, 그가 여자를 사랑하는 작동 방식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레이 사용 매뉴얼에는 “커피 마셔요!”가 있을 뿐, “커피 마실래요?” 같은 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아나에게 내민 계약서의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흡연과 음주는 물론이고, 자신이 정한 건강 식단으로만 식사를 해야 하고, 지정한 의사에게 처방받은 피임약만 먹을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레이는 ‘성경험이 없는’ 아나의 몸을 자신의 욕망에 맞게 디자인한다. 조금만 더 나가면, 가장 아끼는 수갑 사이즈에 맞게 그녀의 손목 사이즈까지 짜맞추려고 할지도 모른다. 계약서는 성적 행위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가령 성관계시 주먹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천장에 매달릴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관능의 한계를 벗어나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기 고백적인 얘기는 영화에서 조금 더 이어지는데 그는 ‘종속의 자유’에 대해 역설하고, ‘책임지지 않는 안전함’에 대해 설파한다.

그레이의 계약서는 내게 주중 섹스의 최저 횟수, 바람을 피울 경우 내는 벌금액 같은 구체적인 조항이 명기된 미국 슈퍼 리치들의 ‘혼전 계약서’를 연상시켰다.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미리 헤어질 것을 ‘대비’하는 철두철미한 미국식 매너가 어쩐지 이 시대의 불안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내가 영화에서 본 가장 흥미로운 장면 역시 뜨거운 베드신이 이어지던 중, 그레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콘돔을 착용하는 ‘몸짓’이었다. 그 얇은 고무막이 사도마조히즘의 기괴한 폭력성을 감싸며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장면 말이다.

성 역학 바뀐 시대, 전통적 남자에 대한 향수
내게는 그레이 열풍이 성 역학이 바뀐 시대에 대한 향수, 과거의 회귀처럼 읽힌다. 과거의 남자들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거절당하는 공포를 수컷의 당연한 운명이라 받아들였고, 자존심을 세우는 건 여자의 몫이었다. 이 말을 여자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서 괴로운 밤을 보내는 건 모두 남자의 몫이었다는 뜻이다. 이 남성적 전통의 세계는 점점 희미해지다 못해 희귀해지고 있다. 사실 ‘그레이’의 매력은 그가 띄운 값비싼 헬리콥터라기보다 그가 자신의 여자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며 하는 “이제, 어디에도 못 가요!”라는 말에 더 가깝다.

연애의 전초 단계를 일컫는 ‘썸탄다’라는 신조어의 반작용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피로감이다. ‘썸’은 중간지대의 애매모호한 말로, 아주 좋거나, 정말 싫은 세계와 거리가 먼 말이다. ‘썸탄다’라는 신조어는 ‘간본다’라는 옛 말의 새버전처럼 보이지만, 사실 맥락이 다르다. ‘썸’이 부정도 긍정도 아닌 사회적 현상을 일컫는 단어라면 ‘간’은 종종 부정적인 의미의 개인행동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썸’의 이면에는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적 불안이 존재한다. 취업, 결혼, 육아, 이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대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죽도록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 앞에서 끊임없이 서로에 대한 안전거리를 요구하고, 또 요청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지점에까지 합의에 이르면, 새로운 도덕이 될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가고 싶은데 정보가 너무 많고, 맛집을 찾고 싶은데 어떤 게 광고고 무엇이 정보인지 모르겠다. 비유하면, 세계가 한 권의 책이던 시절에는 보기 쉽게 정돈된 목차와 프롤로그, 에필로그가 존재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세계엔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만든 이 시대의 새로운 질병이다.

“종속의 자유 누리고 싶다” 새로운 욕망 꿈틀
그런데 막 사랑하기 시작한 남자가 오늘 내가 먹어야 할 음식과 내일 내가 가야 할 곳과 잠잘 곳을 정해주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무척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원작과 영화에서 선택은 책임을 내포하는 말이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며, 이 말은 불안한 시대의 정서를 자극한다. 많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에 깊은 피로감을 느꼈던 여자들의 누적된 피로가 한 남자의 행위를 통해 보상받는 것 같은 기이한 착시감을 느낀다. 그레이의 말처럼 ‘종속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이 꿈틀댄다. 그것이 성숙한 사랑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판타지는 현실과 거리가 멀수록 더 달콤해진다.

원작이 텍스트를 넘어 영화로,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 확장되는 방식은 더 흥미롭다. ‘그레이’가 촉발시킨 관능이 능동적이며 폭발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원작에 심취했다는 아내의 요구로 새로운 섹스 기구를 구입한 남편의 후일담이나, 수갑이나 노끈을 풀지 못해 겪는 해프닝 기사, 영화를 패러디한 ‘그레이 투어’의 존재도 그렇다. 온라인 매체 엘리트데일리에 따르면, 영화 속 그레이 커플처럼 주인과 노예 계약서를 작성하고 데이트를 체험할 수 있는 패키지의 예약이 4월까지 이미 꽉 찼다고 한다.

원작에서 수동적이기만 했던 아나는 모든 것을 조종하려 들었던 그레이를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구출하고 끝내 변화시킬 것이다.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사도마조히즘 소설의 면죄부 역시 사랑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의 ‘나쁜 남자’ 신화는 이렇게 완성되며, 그것이 서두에서 말한 장르의 규칙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말했듯 에로티시즘은 종족 번식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무관심하다. 여기에서 ‘그레이’는 결국 결혼으로 가는 종착역이 아니라, 여자들의 숨겨진 욕망을 일깨우는 매개체임이 증명된다. 임신에 대한 공포 없이 자신의 관능의 끝을 들여다보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여자’에게도 있다는 명확한 증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글 백영옥 소설가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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