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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라서? 여성이라서? 아직 갈길 먼 세상

아카데미 시상식에 잘 생기고 멋진 노래만 부르는 존 레전드가 나와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수상 소감이 가슴을 쿵 때렸다. 마틴 루터 킹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주제가상을 받은 그는 “킹이 행진했던 50년 전과 지금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며 흑인의 인권과 정의를 말했다. ‘흑인 대통령, 흑인 슈퍼스타들이 쏟아지는 미국에서 아직도?’ 싶었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나를 놀라게 하는 것들

아카데미만 하더라도 80년이 넘는 역사에서 2900여 개의 오스카 트로피 중 흑인이 가져간 게 존 레전드까지 해서 겨우 서른 두 번이란다. 2002년 할리 베리는 73년 만에 처음 나온, 이후에도 없는 유일한 흑인 여우주연상 수상자다. 나만 놀란 사실일까.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지치지도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들은 너무 많다. 변해야 하는데, 변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또 다른 감동 수상소감의 주인공 패트리샤 아퀘트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와 임금”을 말했다는데, ‘실리콘 밸리의 여 회장님 비율이 1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로 통탄하는 미국의 현실은 한국에 비하면 한가해 보인다.

며칠 전 설날만 해도 출세했다 싶은 여교수, 여사장님 친구들이 만두를 수백 개 빚었네, 기름 냄새로 두통 참아가며 하루 종일 전을 부쳐야 했네, 이십 년째 불평을 늘어 놓는다. 한 유명 남자 방송인이 “IS 테러집단보다 더 나쁜 건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여자들의 말빨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커졌나 싶은 이곳 한국에서 말이다.

내 사정도 마찬가지다. 출퇴근길에 타는 버스에서 잠시만 졸아도 어느새 내 허벅지에 바싹 붙어있는 옆자리 남자의 허벅지를 뜨듯하게 느낄 때, 수십 년 째 지치지도 않고 틈을 노리는 남자들의 성추행 의지는 지치지도 않고 나를 놀라게 한다. 이제는 나도 노련한 사십대가 되어 그런 행위에 응대하는 법을 익혔음에도.

변화를 거부하는 사소한 놀라움은 훨씬 더 많다. 고장이 났는지 매일 굳세게 버티며 왼쪽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체중계의 바늘, 계절이 바뀌어 겨울 옷을 벗고 스커트를 입었을 때 변치않고 꽉 끼는 허리. 늘 세일을 한 대서 큰맘 먹고 달려간 백화점 혹은 아울렛 매장에서 눈을 번쩍 뜨고 다시 보게 만드는 가격표, 매년 겨울마다 날아오는 난방비 적힌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그런데도 변치않는 월급 봉투의 얇은 두께. 모두 익숙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볼 때마다 처음 본 듯 마음을 덜컹 내려앉게 한다.

아, 그러나 무엇보다 “올해 몇 살이지?”라는 질문을 받은 순간만큼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놀랄 때는 없을 것 같다.

늘 “세상 많이 좋아졌어”라는 말을 듣고 살아왔는데 과연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과연 변하고 있는 걸까. 좋은 변화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할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흑인은 백인들과 같이 버스에 탈 수도 없었다고 하고, 여자들이 교수가 되고 사장이 되는 일도 꿈도 꾸지 못했던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을 테니. 옆자리 남자가 허벅지에 손을 턱 얹어 놓고 시치미를 뚝 떼던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성추행’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에 비하면 지금은 나아진 거라고, 나아질 거라고, 그렇게 여전히 놀라는 마음을 달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기분 좋은 놀라움도 있다. “언제 철들고 어른 될래?” 잔소리를 늘어놓아야 했던 아이들의 키가 하루아침에 쑥 자라난 걸 발견할 때, 더 이상 바지가 맞지 않아 새 바지를 사줘야 할 때. 볼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흐뭇하게 놀란다. 이제 3월이다. 찬바람에 떨 때는 영원히 메말라 있을 것 같던 꽃나무에 슬며시 꽃망울이 맺힌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만큼 어김없는 일은 없다. 그런 놀라움 때문에 여전히 세상의 변화에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 비평 칼럼을 써왔으며 중앙SUNDAY와는 창간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현재 뉴스통신사 뉴스1 디지털 전략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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