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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敵은 측근 … 실장은 맷집 키우고 악역 맡아야”

중앙포토
이병기(68)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임명되자마자 이튿날인 28일부터 업무에 착수했다. 토요일이지만 10시쯤 청와대로 출근해 오후까지 10개 수석실별로 보고를 받았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은 1일부터 중동 4개국 순방에 나서 9일간 한국을 비운다. 초보 비서실장이지만 대통령을 대신해 수석비서관회의 등을 주재하며 국정 전반을 챙겨야 한다.

[2·27 청와대 개편 이후] 전직 4명이 말하는 대통령 비서실장

이토록 청와대 비서실장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리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사표 수리 이후 후임자를 정하기까지 지난 열흘간 대한민국은 “누가 차기 비서실장이 될 것인가”에 온통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하마평에 오른 후보군만 족히 20명이 넘었다. “김기춘 실장 덕분에 비서(secretary)의 사회적 위상이 새삼 높아졌다”란 소리가 농 반 진 반 시중에 퍼졌다.

노재봉(79) 전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 “비서실장이 뉴스 전면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단언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두 번째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그는 “비서실장은 스태프다. 주인공이 아니다. 무대에 올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4명의 전임 비서실장으로부터 경험과 조언을 들었다.

“측근 관리가 가장 어려웠다”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노재봉 전 비서실장은 “청와대 경험이 있으니 기강을 잘 잡을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73) 의원은 “국정원장이 비서실장으로 간 건 이해하기 어렵지만 개인 경력이나 능력으로 봐선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77)씨는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집권 초반 문제가 있는 장관을 DJ가 임명했다. 여론이 들끓었고, 연립정부였던 자민련도 반대했다. 김종필 총리와 박태준 자민련 총재까지 ‘이 사람 곤란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날은 난 조용히 있었다. 대신 다음날 아침, 대통령 관저를 찾았다. 눈치를 살피며 슬쩍 운을 뗐다. ‘오히려 지금 임명을 철회하는 게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결코 대통령 리더십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겁니다.’ 그랬더니 DJ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전 비서실장은 “노(NO)라고 할 줄 알아야지, 노(NO)가 절대 선은 아니다”며 “직언을 할 때라도 대통령의 명분을 세워야 한다. 타이밍도 조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청와대 문건 유출에 김영한·음종환 파문까지 잇따르면서 청와대 내부 문제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을 크게 떨어뜨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조지메이슨대 제임스 피프너 교수는 『관리자적 대통령학(The Managerial Presidency)』에서 “대통령 명성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정치적 정적 때문이 아니라 비서실 내부 구성원의 과도한 충성심이나 실수 때문”이라고 적시한 바 있다.

박지원 의원 역시 “대통령에겐 야당이 아니고 측근이 원수”라며 “비서실장 하면서 측근 관리가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임기 말엔 측근도 친·인척도 다 자기 살려고 튄다. 악역을 내가 맡았다. 동교동 가신들을 내가 다 쳐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금 여당 의원 중 무려 7명이나 청와대·내각에 있다. 이들 모두 당장 내년 총선 때 나오려고 할 텐데 통제할 수 있겠나. 과연 이병기 신임 실장이 얼마나 독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노재봉·김중권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강조했다. 노 전 실장은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건 자유로운 얘기 속에서 간파될 수 있다. 방향을 이해하면 각론이나 실무 정책은 수석비서관과 상의하면 된다”고 했다. 특히 김 전 실장은 “청와대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 있다. 그때 이를 적절하게 정리하는 선봉에 서는 게 비서실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평상시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어야 대통령의 오판을 이야기할 수 있다”며 “눈치만 보고 뜻만 살피는 비서실장은 쓸모없다”고 지적했다.

“비서실장 인선이 퀴즈는 아니다”
한국행정연구원은 2013년 하반기 ‘역대 비서실장 중 누가 역할을 잘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과장급 이상 공무원 76명, 국회의원 70명, 행정·정치학자 72명 등 218명을 대상으로 했다. 복수 응답 결과 1위 문재인(45.9%), 2위 박지원(28.4%), 3위 한승수(27.1%), 4위 이후락(21.1%), 5위 김정렴(16.5%) 등의 순이었다. “위임 받은 권한을 적절히 수행했다”가 문재인을 택한 주된 이유였다. 박지원을 꼽은 이유론 “대통령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았다” “조직 내 갈등관리 조정” 등이었다.

이에 대해 박지원 의원은 “비서실장은 맷집이 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DJ가 임기 1년을 남겨두고는 몸이 안 좋아져서 대면보고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각 수석실에 연락해 ‘매일 보고할 내용을 A4 용지 한 장에 써서 12시까지 가져오라’고 했다. 그걸 숙지해 오후 2시에 관저로 들어가 보고했다. 다른 장관·수석들은 대통령을 못 만나니 당연히 ‘박지원이 대통령 대신 결제한다’ ‘저 놈이 간신이다’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런 음해·모략을 거뜬히 넘겨야 한다.”

비서실장 공백이 열흘간이나 이어진 데 대해선 박관용 전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 대체재를 찾는 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인간적 친밀도나 치밀한 업무처리, 풍부한 경험 등에서 박근혜 철학을 김기춘만큼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다. 대통령으로선 버리기 싫었을 텐데 워낙 반대 여론이 크니…”라고 했다. 박 전 실장은 “이참에 대통령이 비서실 운영 방식을 바꿨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비서실이 내각화되면 곤란하다. 비서실이 각 부처를 장악하면 장관들은 눈치만 보고 움직이질 않는다. 과거 김기춘의 장악력을 오히려 조금 분산해서 내각에 책임과 권한을 넘겨야 국정이 더 원활해질 것”이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김병준(행정학) 국민대 교수도 “지난 열흘간 사람만 넘쳐났다. 마치 퀴즈를 풀 듯 누가 될지만 궁금해했다. 인사는 게임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일이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 차 이후 어떤 성과를 낼지에 논의가 모아져야 했다. 그랬다면 적합한 인물을 찾는 것도 쉬웠을 것이며 국가적 낭비도 줄었을 것”이라고 했다.

4명이 공통적으로 꼽은 비서실장의 덕목은 “대통령의 약점 보완”이었다. 박지원 의원은 “국정을 운영하는 건 비서실장이 아니다. 대통령과 내각이다. 비서실장은 둘을 잘 연결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김중권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신임 이병기 실장이 잘 메워줘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최민우·이충형·천권필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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