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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플래쉬', 이것은 음악영화이자 피 튀기는 격투기

[매거진 M]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가 본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사진 영화사 제공]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에서 재즈는 로맨틱의 동의어나 다름 아니다. 남녀 사이의 무드가 피어 오를 때 단골로 삽입되는 곡은 재즈풍의 멜로디다. 재즈광으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에서도 열정, 숭고함 뒤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코드는 재즈의 로맨틱함이다. 혹은 도시의 퇴폐적 밤을 상징하는 음악이기도 하다. ‘콜래트럴’(2004, 마이클 만 감독)에 등장하는 재즈 클럽신은 이 누아르영화의 가장 강렬한 미장센이다.



‘위플래쉬’는 재즈 장인과 드러머가 각을 세우는 영화다. 하지만 극 중 재즈는 로맨틱하지도, 퇴폐적이지도 않다. 이 영화에서 재즈를 다루는 방식은 차라리 무협영화에서의 수련과 맞닿아 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음대에서 드럼을 전공하는 19세 앤드류 혼자 연습을 하던 중 우연히 플렛처 교수의 눈에 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플렛처가 이끄는 오케스트라 밴드에 발탁된다. 행복은 거기까지. 플렛처는 첫 리허설부터 앤드류를 몰아붙인다. 구타도 마다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건 없다. 단지 자신의 리듬을 치라고 다그치며 끝없이 반복시킬 뿐이다. 심지어 다른 드러머와 메인 연주자 자리를 놓고 경쟁시킨다. 이 폭압 앞에 앤드류는 굳은살이 떨어져 피가 나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블랙 스완’(2010,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에서 니나(나탈리 포트먼)가 그랬듯, 성공에 대한 욕망과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결국 앤드류 내면의 광기를 폭발시킨다. 앤드류에게 다른 사람은 끼어들 틈이 없다. 연애도 가족애도 앤드류의 광기에 가까운 집요함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20세기 중반의 재즈 작곡가 행크 레비(1927~2001)의 곡 ‘Whiplash(공교롭게도 채찍질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주인공이 드러머라는 사실은, 음악보다는 잔혹과 극기의 무협 서사를 연상시키는 ‘위플래쉬’의 영화적 리듬을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드러머는 모든 대중음악의 시작점이다. 건축으로 치자면 기초 공사다. 일반적으로 밴드의 최소 단위를 기타·베이스·드럼으로 꼽는다. 최근에는 기타 없는 밴드도 있다. 베이스가 없는 밴드 또한 있다. 하지만 드럼 없는 밴드란 존재하지 않는다. 레코딩을 할 때도 가장 먼저 녹음을 시작하는 게 드럼이다. 드러머가 만든 비트 위에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얹는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드러머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않다. 바이올리니스트·피아니스트·기타리스트·색소포니스트 등 종류를 불문하고 악기 연주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ist’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드럼만 예외다. 행위자를 뜻하는 ‘-er’이 붙어 드러머다. 다른 악기가 멜로디를 만들어낼 때, 드럼은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도 없고, 심지어 가족과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앤드류의 처지는 그래서 드럼에 감정이입 된다. 어릴 때부터 드럼을 연주했던 이유도 불행한 가족사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의 방편이었으리라. 리듬이란 곧 두드림, 원초적 파괴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증폭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재즈 밴드에서 드럼은 곧 직설적으로 감정을 투과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다.



앤드류가 평범한 음대생에서 조금씩 진화하는 과정은 욕망에서 시작해 증오로 발전한다. 플렛처 또한 그렇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연주자를 뽑는 건 욕망이다. 하지만 그렇게 뽑은 학생들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안들면 바로 ‘멘탈붕괴’ 공격을 시작한다. 그 순간, 플렛처는 자신의 제자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한 앤드류, 역시 이 사건으로 사임한 플렛처의 재회를 계기로 그들은 언뜻 화해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화해는 곧바로 증오로 돌변한다. 어떤 진실을 알게 된 플렛처는 앤드류를 엿먹이고, 앤드류 역시 플렛처에 대한 증오를 품고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간다. 무협의 서사마저 뛰어 넘는 구도다. 일반적인 무협영화에서도 이런 악랄한 사부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KO 될 때까지 서로 패고 패고 또 패는 격투 시합에 가깝다. 앤드류에게 플렛처는 스승이자 곧 적인 셈이다. 스승에 대한 저항이자 적과의 격투의 수단이 바로 드럼이다.



이제 플렛처는 앤드류에게 열아홉 살의 드러머에겐 무리일 수밖에 없는 ‘Caravan’ ‘ Whiplash’ 같은 곡을 연주하라고 강요한다.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터치나 리듬감 정도가 아니다. 쉼 없이 더블 스윙 비트를 쳐야하고 나아가 BPM(Beats Per Minute) 400을 찍는 초월적 육체의 단련이다. 다른 악기가 육체적 단련과 함께 해석력, 즉 창의적 영역의 연마를 통해 한걸음 나아간다면, 플렛처는 앤드류에게 오직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고 강요한다. 결국 플렛처의 지휘와 상관없이 앤드류가 드럼 솔로잉을 펼치며 밴드를 이끄는 하이라이트는 스승을 극복하고 적을 퇴치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위플래쉬’를 음악영화를 빙자한 처절한 격투의 드라마로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위플래쉬’는 좋은 음악영화다. ‘와호장룡’(2000, 리안 감독)이 대사보다는 격투신을 통해 인물의 서사를 만들어냈듯, 이 영화 역시 대사나 행동을 통해 앤드류의 심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직 드럼 연주를 통해 심리의 기저를 표출한다. 결국 그를 인정하고야 마는 플렛처 역시 표정과 손짓으로 관계의 역전을 보여준다. 드럼 솔로에서 한없이 템포를 끌어올렸다가 서서히 다운시키고 다시 끌어올릴 때, 모든 걸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플렛처가 영화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 영화의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 순간 영화 관객에서 콘서트장의 관객이 되어 박수 갈채를 보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음악영화에서는 좀처럼 이루기 힘든, 오히려 공연장에서나 가능한 음악적 쾌감을 ‘위플래쉬’는 성취한다.





글=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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