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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15) 린뱌오, 문혁 와중에 장제스에게 충성서약 서신 보내



항일전쟁 승리 후 린뱌오(林彪·임표)가 전시 수도 충칭(重慶)을 방문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만나 묘한 말을 남겼다. “제가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할지, 교장께서 아실 날이 있을 겁니다.”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 부국장 정제민(鄭介民·정개민)에게 린뱌오를 만나보라고 지시했다. 린뱌오는 황푸 선배인 정제민과 이틀 간 밀담을 나눴다. 장제스는 대담을 정리한 정제민의 보고서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

문혁 탐탁찮게 여기며 내심 불만
마오 어록을 화장실 종이로 쓰고용
"거짓말 잘해야 큰일 하다니" 탄식

충칭을 떠난 린뱌오는 동북(東北)으로 이동했다. 3년 간 혹한의 땅에서 동북 야전군을 지휘하며 장제스 군을 괴멸시켰다. 타이완으로 철수한 장제스는 한동안 린뱌오의 음영(陰影)에 시달렸다.



1966년, 대륙이 문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9월 9일, 중공의 유일한 부주석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후계자로 선정된 린뱌오의 얼굴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했다. 타이완의 장제스는 21년 전 소홀히 넘겼던 정제민의 보고서를 찾았다. 날이 밝자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들을 관저로 불렀다. 탁자에 놓인 타임을 손짓하며 단언했다. “린뱌오는 애국자다. 개인이나 정당을 국가와 혼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린뱌오가 마오쩌둥에게 충성하리라고 절대 믿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총통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미래의 1인자로 등극한 린뱌오는 문혁에 관심이 없었다. 중앙 공작자 회의에서 심경을 토로했다. “나는 앞뒤가 맞지 않을 때가 많은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착오를 범한다. 줄이도록 노력하겠다. 수준과 능력이 부족해 사양하겠다고 재삼 간청했지만, 주석과 당 중앙이 이미 결정해버렸다. 적합한 동지가 나타났을 때 이양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겠다.”





당과 군, 전국의 모든 매체가 린뱌오 선전에 나섰다. 마오쩌둥을 신(神)으로 만들려면 린뱌오부터 신으로 만들어야 했다. 선전 전문가들은 반복에 약한 것이 인간이라는 잘 알았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린뱌오의 건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개국원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이 전군 동원대회에서 호언장담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두 사람인 것처럼 마오 주석과 린뱌오 동지도 두 사람이다. 린뱌오 동지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젊고, 건강하다. 마오 주석과 함께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전국과 전 세계를 향해 주석과 린뱌오 동지의 건강을 선전하는 것은 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이날을 계기로 마오와 린뱌오가 홍위병을 접견할 때마다 “주석의 만수무강”과 “부주석의 영원한 건강”을 축원하는 구호가 요란했다. 문인들은 한발 더 나갔다. “린뱌오 부주석의 숭고한 위상을 제고시켜야 한다”며 이름 앞에 “주석의 친밀한 전우, 주석의 계승자”를 붙여야 한다고 우겨댔다. 린뱌오가 삭제를 요청하자 마오는 “삭제라니 말도 안된다. 고칠 필요도 없다”며 당장(黨章)에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공의 흑막 캉성(康生·강생)이 나섰다. “린뱌오 동지는 너무 겸허하다. 우리의 결정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울 게 없다.”



예젠잉과 캉성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저우언라이는 혁명 과정에서 주더(朱德·주덕)가 세웠던 공로를 린뱌오가 했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린뱌오는 문혁이 맘에 들지 않았다. 비서의 회고를 소개한다 “홍위병들끼리 싸움이 벌어지자 린뱌오는 문화대혁명이 무화대혁명(武化大革命)으로 변했다며 곤혹스러워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적으로 몰아 부쳤지만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 비판은 심하게 하지 않았다. 벽에 마오쩌둥 사진도 걸어놓지 않았다. 마오 주석의 어록을 화장실에 놓고 비서들에게 용변 볼 때 쓰라고 했다. 방문객도 차단시켰다. 타오주(陶鑄·도주)만은 예외였다.”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후계자로 정하기 전에 광둥(廣東)성 서기 타오주를 부총리 겸 선전부장에 임명했다. 서열도 저우언라이 다음인 4위에 안배했다. 타오주는 동북 시절부터 린뱌오의 직계였다. 성격이 불 같았지만 린뱌오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다. 베이징 생활을 시작한 타오주는 린뱌오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횟수가 늘수록 대화 범위도 넓어졌다.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자연스럽게 입에 올랐다. “의심 많고, 변덕이 심하다. 허물은 남에게 뒤집어 씌우고, 공을 가로채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도 언제 류사오치 꼴이 날지 모른다. 교장은 온갖 신산(辛酸)을 다 겪었다. 광둥으로 모셔 올 수만 있다면 중국의 평화를 기약할 수 있다.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다.”



듣고만 있던 린뱌오는 “거짓말을 잘해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니! 인간으로 태어난 게 슬프다”며 동조했다. 본격적으로 문혁에 뛰어든 린뱌오는 반대파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했다. 장제스는 린뱌오가 황푸 시절 사용하던 이름으로 보낸 충성서약 서신을 믿지 않았다. 린뱌오 사망 후, 중공은 베이징을 탈출한 린뱌오가 광저우에 새로운 당 중앙을 설립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장제스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중국은 복잡한 나라다. 소설에나 나옴직한 얘기들이 사실인 경우가 많다.



김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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