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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이 만난 사람] 노무현 정부 때 비서실장,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직제가 처음 생긴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1960년)부터 지금까지 비서실장을 지낸 인사는 모두 35명이다. 27일 새로 비서실장에 지명된 이병기 국정원장이 36대 실장이 된다. 권력의 핵심인 비서실장엔 대통령의 복심(腹心)이나 측근들이 발탁돼 왔다.



"목사, 편집국장, 전직 장성 …
다 만나 갈등 풀겠다 했더니
노 전 대통령이 내게 자율권"

 이런 공식을 깬 파격 비서실장으론 노무현 전 대통령을 1년6개월(2004년 2월~2005년 8월)간 보좌한 김우식(75) 전 연세대 총장이 꼽힌다. 진보 대통령- 보수 비서실장이란 이질적 조합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실장 인선을 둘러싸고 장고(長考)를 거듭하던 지난 25일, 김 전 총장을 만나 새 비서실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조언을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는 “제가 시원찮게 했기 때문에 당부 말씀 드릴 건 없다”면서도 “대통령에게 가급적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릴렉스(휴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을 구중궁궐에 갇혀 있게 하지 말고 자꾸 밖으로 나와 일반인들과 같이 호흡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주문도 했다.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은 “대통령 눈치만 보지 말고 대통령과 국민이 서로 호흡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종택 기자]


 - 어떻게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나.



 “노 전 대통령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당시 난 연세대 총장으로 대교협 회장을 겸하고 있을 때여서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불가) 정책 등으로 정권과 갈등이 심했다. 비서실장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2003년 10월 말 노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식사를 했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 비서실장을 제의하더라.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나왔지만 노 전 대통령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수락했다.”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총장을 설득한 과정이 흥미롭다. 첫 만남부터 취임 때까지의 4개월은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해 세 번이나 초막을 찾아갔다는 고사성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연상시킨다. 김 전 총장의 회고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2003년 10월



 ▶노 전 대통령=“저를 위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김 전 총장=“대통령 임기 5년은 아주 중요한데 허송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대통령이 되셨으니 성공한 5년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갈등과 분쟁이 심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너무 튀는 행동과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소박함과 진솔함을 표출하는 건 좋지만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갈등과 분쟁 해소를 우선하십시오. 그래야 나머지 4년을 잘 추스를 수 있지 않습니까.”



 ▶노 전 대통령=“청와대로 들어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김 전 총장=“전 정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대통령도 잘 모릅니다. 비서실장은 측근 중의 측근이라는데 대선 때 노 대통령을 찍지도 않았습니다.”



 ▶노 전 대통령=“아마 많은 대학 총장이 저를 안 찍었을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김 전 총장=“대학 총장이 어떻게 비서실장을 합니까. 죄송합니다.”



 #2004년 1월



 ▶노 전 대통령=“생각 좀 해보셨습니까.”



 ▶김 전 총장=“지난 번에 다 말씀드렸습니다. 왜 하필 저 같은 대학 총장에게 맡기려 하십니까.”



 ▶노 전 대통령=“연세대라는 큰 조직과 네트워크를 잘 관리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저한테 갈등과 분쟁 해소를 얘기했는데 제가 학연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김 전 총장=“전 능력이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제가 그렇게 싫으시면 나라를 위해, 국가를 위해 맡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학 총장도 국가를 위해 하는 거 아닙니까. 이쪽에서 좀 봉사해주십시오.”



 철옹성 같던 김 전 총장의 마음이 이 대목에서 흔들렸다고 한다. 그는 “내가 맘에 안 들더라도 나라를 위해 꼭 맡아달라는 그 한마디에 딱 가슴이 막혀버리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면서 “총장 임기를 몇 개월 남겨놓은 상태에서 비서실장 들어간다고 하면 보수 쪽, 기독교단 쪽에서 반발이 있겠지만 갈등과 분쟁 해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번 해보자는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 노 전 대통령의 당부는 뭐였나.



 “갈등과 분쟁 해소를 위해, 내 생각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두 가지를 약속해달라고 했다. 앞으로 목사님들, 종교계 사람들, 신문사 편집국장·주필, 대한민국 성우회, 교수들….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다 만나 갈등과 분쟁 해소에 물꼬를 터 나가는 데 집중할 수 있게 자율권을 달라. 저에 대해 음해하는 얘기가 나올지 모르는데 그때는 저에게 말씀해주시라. 제가 그만두는 모양을 갖춰달라. 그 관계만 유지되면 저도 모든 걸 다 말하겠다고 했다.”



 - 실제로 그렇게 했나.



 “실장 취임하고 첫 미팅으로 목사 15분과 식사를 했다. 목사님들이 ‘기독교대학 연세대 총장이 그런 불그죽죽한 데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공격하더라. 친북좌경·반미 세력들로는 나라 장래가 없다고 했다. 돌아와 노 대통령과 3시간가량 둘이서 밥 먹으면서 토론을 했다. 목사님들 입에서 친북좌경이란 얘기가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어떻게 답변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 대통령 표정이 어땠나.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바로 풀렸다. (노 전 대통령은) 북한은 내 손녀딸 같은 애들한테 분유가 없어서 못 먹이는 나라다. 영양실조 걸려 자라지 못하는 애들한테 밥은 먹여야 하지 않나. 내가 뭣 때문에 김일성·김정일을 흠모하겠나. 또 실장님도 학교 다닐 때 미군 군복 물들여 입고 다니는 것 보지 않았나. 만약에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부산이 견뎌냈겠나. 하지만 이젠 주권을 좀 가져야겠다. 우리나라 지키는 데 우리 군에 작전권도 없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대전 국방과학연구소 밖에 레이더가 설치돼 미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저는 반미주의자도, 용공좌경도, 친북 세력도 아니고 대한민국 세력이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목사님들께 잘 말씀해주시라고 하더라.”



 -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일 때면 나는 영천시장 같은 델 가고 일부러 택시도 타고 다녔다. 한번은 대통령한테 ‘택시 기사가 대통령 보고 빨갱이라고 합디다’고 전했다. 순간 대통령이 ‘실장님,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느냐’며 역정을 내더라. 나도 머쓱해져서 ‘죄송합니다. 제 말이 역정스럽다면 제가 여기 온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말 다 들으시고 같이 갈등을 풀려 노력하려고 저를 부르신 거 아닙니까. 제가 좋은 말만 해서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곧바로 대통령 표정이 풀렸다.”



 - 어떤 실장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나.



 “비서실장 일이 뭔지 잘 모르지만 대통령과 흉허물 없이 대화하는 것,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갈등과 분쟁 해소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대통령과의 소통엔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노 전 대통령은 ‘코드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코드 논란이 있었지만 인사를 할 때 보면 아는데 내가 있는 동안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이 사람으로 하세요’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지금이 더 코드 인사 아닌가 싶다.”



 - 한계를 느낀 적은.



 “2005년, 대통령이 수석들을 긴급 소집해 대연정 구상을 밝혔다. 내가 ‘국민들과 보수진영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또 하나의 꼼수로 장난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순간 조용해지더라. 대신 대통령이 ‘제가 잘 할게요’라고 했다. 그해 6월 대통령에게 ‘지금 정국이 잘 안 풀린다. 비서실장 카드를 쓰시라’고 건의하고 8월에 청와대를 떠났다.”



 - 아쉬움은 뭔가.



 “갈등과 분쟁 해소도 더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역부족이었다. 정국이 안 풀리니까 답답했다. 내가 좀 더 정치 쪽으로 깊이 들어갔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설득할 수 있었을까 싶은데, 신뢰를 안 하려고 하니까 어려웠다.”



 - 현 정부 들어 유독 총리·장관 후보자 낙마가 많았다. 왜 그렇다고 보나.



 “떨어진 사람들이 결정적 흠결이 많아서라기보다 어떤 면에선 공격에 대해 감당을 못하고 어설프게 서툴게 해서 낙마 현상이 자꾸 벌어지지 않았나 싶다.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이 있어서 신뢰를 보낸다고 자신 있게 디펜스하고 국민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없다. 그게 바로 소통이다.”



 - 새 비서실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에 난 할 말도 없지만 그래도 당부드릴 말씀은, 대통령 눈치만 보고 매달리지 말고 성공한 대통령, 뒷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지는 대통령을 만드는 데 헌신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대중들과 격리시키지 말고 인간적으로 친화되도록 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국민이 바다면 그 위에 떠 있는 배가 대통령인데, 바다와 격리돼 배가 어떻게 운항할 수 있겠나. 시장 방문 같은 공개 행사도 좋지만 많은 계층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다양하게 만나 속에 있는 말씀 좀 하시면 좋겠다. 국민들 가려운 데를 긁어주려는 모습을 국민이 바라는 것 아니겠나. 비서실장이 자꾸 통로를 터주는 게 중요하다.”





[S BOX] 창의성 아카데미, 탈북학생 대안학교 … 분초 단위로 사는 김우식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은 공직(비서실장·과학기술부총리)을 떠난 이후 창의공학연구원과 과학문화융합 포럼을 이끌어 오고 있다. 둘 다 창의성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그는 이공학도(연세대 화학공학과)다. 하지만 과학기술만으론 창조적 결과물을 얻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과학기술과 철학·예술·문화 등 인문학적 접목을 통한 융·복합 유기체로 엮는 게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창의성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창의성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막강한 잠재력인데 유효적절하게 우려내서 쓰는 게 비결이다. 그 방법을 연구해 보자고 해서 연세대 총장 할 때 교수들 중심으로 창의성 공부 모임을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기업·언론·문화예술·학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고 하면서 창의성 개발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연구개발하고 있다. 벌써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이 400명이 넘는다.”



 김 전 총장의 하루는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명상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총장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명상에 이어 독서와 원고 집필을 하는 등 요즘도 분초를 다투며 시간을 쪼개고 있다.



 그에게 “나이 들면서도 활력을 잃지 않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창의성을 공부하는 사람은 안 늙는다. 오늘도 변화를 모색하고 살아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추구하며 자꾸 변화를 모색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즘 김 전 총장에게 또 하나의 ‘일’이 생겼다. 탈북 학생들을 돕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경기도 의정부에 한꿈학교라는 대안학교를 만들어 고교·대학 진학을 원하는 탈북 학생들에게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시키고 있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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