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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불안해도 괜찮아, 정년이 끝은 아니야

[일러스트 강일구]


55세부터 헬로라이프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북로드 펴냄

376쪽, 1만2800원




55세는 죄인가? 지금 한국 사회 분위기를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퇴(半退) 세대’라는 신조어의 첫 시험대에 떠밀려나온 상징 나이 55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억울한 55세 세대에게 윙크를 보낸 사람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63)다. 한국 독자에게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한없이 가까운 그 불온과 질풍노도의 무라카미 류다.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서 써나간 중편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이하 『55』)를 들고 그가 ‘헬로’ 인사하며 돌아왔다.



 

『69』에서 『55』로



무라카미 류.
 소설가는 늙었고, 문학도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죄인가? ‘아니다’라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자전소설로 청춘을 노래했던 1987년 작 『69』의 무라카미가 지녔던 팽팽한 육체는 『55』에 없다. 대신 세월이 열매처럼 가져다준 생각의 힘과 공감의 결이 흐물흐물한 육체를 채웠다. 『69』에서 『55』로 오는 길에 동년배들과 맺은 다양한 관계가 다섯 편 소설을 관통하며 서로 공명한다. 그 핵심어는 신뢰다. 작가는 ‘신뢰’라는 말과 개념을 이토록 깊이 의식하며 소설을 쓴 것도 처음이라고 털어놓는다.



 “사람은 집이나 학교에서 누가 부르면 대답을 해라, 부르면 가라고 배우지요. 그러니까 누가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얘기죠. 하지만 개는 부르는데 오지 않는다고 막대기로 때리거나 하면 더 오지 않을 거예요. 이름이 불리고, 이리 오라는 말을 듣고, 주인에게 가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니까 가는 것, 나는 그런 게 진정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해요.”(250쪽)



다섯 명의 남과 여



 다섯 편 중편소설에 등장하는 다섯 명 주인공은 중늙은이란 명칭이 적당한 보통 사람들이다. 정년퇴직 후 이들에게 찾아오는 어려움이, 특히 경제적인 격차에 따라 다채롭게 펼쳐진다. 논픽션이 아닐까 싶게 정밀한 취재력이 시시콜콜 적확하게 묘사되는 돈 문제에서 빛난다. 돈이 왕이 된 시대에 돈과 멀어지게 되는, 실체 없는 그 ‘중산층’의 비애다. 택시 요금 미터기를 훔쳐보며 새가슴을 졸이고, 알량한 저금 잔고를 몇 번씩 챙기며, 허울 좋은 ‘실버인재센터’가 가뭄에 콩 나듯 던져주는 잔디 깎기 같은 일을 챙기게 되면 인식의 전환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도대체 이제까지 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일본은 30년 전이나 40년 전에 비하면 월등히 풍요로워졌는데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돌아가지 않는다. 춘계 임금 인상 투쟁에서도 대기업 노조는 경영진에게 굴복했고, 요 근래 급료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르기는커녕 실적이 부진한 가전제품 회사에는 구조 조정 바람이 불고 있다. 대기업이 그런 상황이니 중소기업 사원이나, 파견 직원, 아르바이트 직원들의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313쪽)



 정년퇴직한 남편과 이혼한 뒤 결혼상담소를 드나들며 별별 남자를 다 만나는 나카고메 시즈코, 작가 지망생이었지만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하고 파트타임을 뛰며 노숙자가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인도 시게오, 회사명을 떼어냈더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낱 쉰여덟 살의 전직 세일즈맨이 돼 ‘부정수소(不定愁訴) 증후군’을 앓는 토미히로 타로, 삼식이(퇴직 뒤 세끼를 다 집에서 챙겨먹는 남편)보다 애견 보비를 더 좋아하다가 보비의 죽음 이후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남편과 관계를 회복해가는 다카마키 요시코, 운송 회사에서 해고된 뒤 이혼하고 트럭 운전 일을 하며 고서점에서 만난 여성과 새 삶을 꿈꾸는 시모후사 겐이치, 이들 하나하나에게 따뜻하고 너그러운 눈길을 보내는 작가는 처진 어깨를 툭 치며 스스로 정면 대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년이라는 게 미리 경험할 수 없는 거잖아. 인생의 반을 훌쩍 넘긴 시점에 다들 처음으로 정년이라는 것을 맞이하는 셈이지.”(180쪽)



 일어나 걸어라, 홀로



 그러니 징징거리지 말고 다시 일어나 걸어 나가라는 것이다. 무력감에 압도되어 뭔가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면. 받아 든 목숨, 길어진 목숨, 버릴 수 없는 목숨 앞에서 겸허하게 거듭나기를 해야 할 나이, 그 55세에 ‘헬로 라이프’를 외치라고 왕년의 무라카미가 등을 떠민다.



 “돈이나 건강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불안투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독은 아니다.”(76쪽)



[S BOX] 우리를 살리는 차 한 잔



괴이한 사건도, 깜짝 반전도 없는 다섯 편 중편소설에 공통으로 등장해 슬며시 감초 구실을 하는 것이 있다. 음료수다. 시들어버린 인생을 반추하며 맥이 가물거리는 중·장년 주인공들은 다시 살아야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여정 또는 순간마다 마실 거리를 찾는다. 진액이 빠져나가 팍팍하고 바스락거리던 삶은 음수(飮水)로 차오른다.



 ‘결혼 상담소’의 얼그레이 홍차,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물, ‘캠핑 카’의 커피, ‘펫로스’의 보이 차, ‘여행 도우미’의 일본 차는 이들 연속 중편소설을 꿰는 끈 구실을 한다. 무라카미 류는 물에 집착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맛있는 물 한 모금이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설파한다. “뭔가 괴로운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천천히 물을 마셔라. 그러면 일단 마음이 차분해지지.”(85쪽)



 차 한 잔은 때로 위기의 인간을 구하기도 한다. ‘결혼 상담소’의 여주인공은 낯선 남자가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보곤 그에게 얼그레이 홍차를 한 잔 보내곤 생각한다.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 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58쪽) ‘음료수 치유법’은 간단명료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고 난 뒤 실천해 볼 일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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