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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사람

정여울
문학평론가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왠지 안심이 되는 순간이 있다. 아파트를 매일 반짝반짝 윤이 나게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게 되고, 해마다 부지런히 신간을 내며 잊지 않고 빠짐없이 책을 보내 주시는 작가들에게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부모님 댁에 찾아갈 때마다 어린 시절 자주 드나들던 문방구가 아직 남아 있음에 안도하고,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아플 때마다 찾아갔던 오래된 약국이 아직 건재함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렇듯 익숙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 주시는 오랜 이웃들은, 매일 볼 수는 없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기억의 주춧돌이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도 많다. 생선구이와 청국장이 참 맛깔스럽던 홍대 근처 밥집이 사라졌을 때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고, 스파게티와 리조토가 일품이었던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없어졌을 때는 요리사 아저씨의 슬픈 얼굴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그곳이 그리웠다. 얼마 전에는 단골미용실의 헤어스타일리스트가 갑자기 사라졌다. 몇 년간 정들어 버린 그녀가 없어지자 가슴 한구석이 시려 왔다. 언제나 말이 없던 그녀가 참 좋았는데, 막상 그녀가 사라지자 ‘이야기라도 좀 나눠 볼걸’하는 후회가 밀려 왔다. 어린 시절 정든 골목길을 떠난 후 ‘이제 나는 이웃이 없어졌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매일 볼 수는 없지만 ‘마음 속 인연의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가 내게는 소중한 이웃이었다.



 몇 달이 지나 다시 미용실에 가보니 놀랍게도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얼굴 가득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고, 내 머리를 다듬어 주는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나의 갑작스럽고 격한 애정표현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흥미로운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고교 시절부터 가위를 잡아 또래보다 일찍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된 그녀는 10여 년 일하면서 한 번도 긴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애 처음으로 석 달의 휴식기를 갖는 동안 그녀는 필리핀에서 다이빙 자격증을 땄고, 함께 간 친구는 아예 다이빙 트레이너가 되어 필리핀에 눌러앉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도 살짝 유혹을 느꼈지만 자신이 결국 가장 원하는 것은 이 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처음으로 천직이라 믿었던 일을 놓아봄으로써 백 번을 생각해 봐도 그 일이 진정으로 자신의 천직임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예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활기차고, 씩씩해진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그저 그녀가 돌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내게 ‘익숙해져 버린 존재들에 대한 감사’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그저 늘 거기 있을 것만 같은 정든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상실감이라는 질병에 대비하기 위한 최고의 예방접종은 바로 ‘감사’다. 평소에 더 많이 더 깊이 감사할수록 우리는 갑작스런 상실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감사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존재들에 스민 무한한 축복을 일깨워 준다.



 옛사람과 현대인의 가장 큰 차이도 바로 ‘감사의 의례’일 것이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감사하고, 해가 뜨면 해가 떠서 감사하고, 한가위에는 ‘오늘만 같아라’고 감사했던 옛사람과 달리 우리는 끝없이 ‘더 잘난 남들’과 비교하며 불평과 불만에 휩싸인다. 뭔가 대박이라도 터져야 감사를 느끼고, 대박이 터져도 더 큰 대박에 투자하느라 감사할 겨를이 없는 현대인들과 달리 옛사람들은 그저 살아 있는 오늘 자체에 감사하는 마음챙김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늘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에는 감사의 여백이 깃들지 않는다. ‘더 높이, 더 빨리’만 외치는 삶에서는 사소한 불상사도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거나 우울증의 근원이 된다. 차라리 ‘인생은 고(苦)’임을 꾸밈없이 긍정하는 것이 아주 작은 기쁨에도 감사할 수 있는 길이다. 오늘도 나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감사는 평범한 식사를 위대한 만찬으로 만들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천상의 쉼터로 만들며,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을 단 한 번의 눈부신 기적으로 만든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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