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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진흙에 묻힌 진옥(眞玉), 이탁오(李卓吾)의 부활


좁디좁은 이 땅에서, 좁쌀 만 한 권력과 빵 몇 조각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와 재갈을 집어던지고 외치는 자의 투쟁이 반복된다. 그러나 대다수는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여도, 재물ㆍ권력ㆍ명예 앞에 한없이 움츠려 든다. 판사도 시민운동가도 빛을 잃었다.

어느 판사는 사채 왕이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고 양심 앞에 침묵하였다. 투기자본 감시센터의 모 시민운동가도 8억의 뇌물에 그만 초심을 잃고 말았다. 꿀 먹은 벙어리는 말이 없다. 양심의 소리에 스스로 귀를 막고 입을 닫았다. 황금에 눈이 멀어 영혼을 판 이들에게, 자유니 정의니 하는 말들은 사치스럽게 들릴 뿐이다.

지금과 달리 참수(斬首)를 밥 먹듯 하던 시절에도, 벼슬을 썩은 생선 보듯 하며 양심을 걸고 소리 높여 외친 자가 있었다. 유교가 ‘갑’의 지위를 차지하던 때, 공자와 주희를 비판하고 노장과 불교, 평등을 말하는 자는 ‘을’이 아니라 구제역에 걸린 돼지처럼 ‘살처분(殺處分’ 당했다. 무지한 백성들에게 사상을 오염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돈과 감투’로 길들일 수 없었던 자유인, 이탁오(1527~1602)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의 거칠었던 삶과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되돌아본다.

탁오의 본명은 이지(李贄)이며, 복건성 천주(泉州) 사람이다. 천성이 자유분방하여 구속을 싫어하였으며 모난 성격이었다. 게다가 의협심마저 강했다. 거인(擧人) 신분으로 29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하남성 휘현(輝縣)의 교유(?諭, 교사)로 관직의 첫발을 내딛었다. 30대 중후반 무렵, 국자감 박사로서 남경과 북경에서 근무하였다. 40대에 들어 양명학에 눈을 떴다.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양지(良知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악을 자각하는 지혜)’의 개념을 궁구하였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던 남경의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시절, 명문가인 경정향(耿定向)ㆍ경정리(耿定理)ㆍ경정력(耿定力) 형제 등과 사귀며 인연을 맺었다. 특히, 자신보다 예닐곱 살 어린 경정리와는 뜻이 맞아 아주 가깝게 지냈다.

54세에 운남성의 요안지부(姚安知府, 요안현의 지방정관 *요안현은 오늘날 운남성 초웅시楚雄市 요안현 이족?族 자치주를 지칭)를 끝으로 25년에 걸친 고된 벼슬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요안지부 시절, 탁오는 소수민족인 이족에게 선정을 베풀어 찬사를 받았다. 청렴한 이탁오에게 가난은 숙명처럼 따라 다녔다. 부부 간에 4남 3녀를 두었으나 큰 딸을 제외하고 물에 빠져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지의 한 많은 인생사다.

사직 후 처와 딸을 데리고 황안(黃安, 지금의 호북성 황강시??市 홍안현紅安縣)에 있는 경 씨 형제의 집을 찾았다. 형제는 천태서원(天台書院)을 열어 교육에 힘썼다. 탁오는 형제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이곳에서 ‘훈장’으로 3년 남짓 지냈다. 대지주이자, 호부상서를 지냈던 고관, 경정향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면 함께 논의하고 계획할 수 없다(道不同, 不相爲謀,《논어ㆍ위령공 衛靈公》).”고 하였다. 경정향에게서, 학문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거짓 유학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58세 때인 1584년 무렵, 흉금을 터놓았던 ‘지음(知音 *벗)’, 경정리가 죽자 이듬 해 거처를 옮겼다. 마성(麻城, 현 호북성 마성시) 용담(龍潭) 호숫가에 있는 지불원(芝佛院)에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로 소일하였다. 이 때 40년 가까이 함께 했던 처와 딸, 외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세속과 인연을 끊으려고 삭발하였으며 수염을 길렀다. 일반 승려들과 달리 수계(受戒)를 받지 않았고 독경과 염불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아내는 삼년 뒤에 죽었다.

지불원에서 불성(佛性)과 만인 평등, 양심과 자유, 동심(童心)의 보존과 회복에 대해 가르쳤다. 인욕을 긍정하며(順人慾), 남녀 간 애정의 자연스러움 등에 관해 설파하였다. “사람마다 모두가 다 성인이요, 부처”라는 양명 선생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부녀자, 비구니를 비롯하여 수많은 남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공자는 “여자와 소인은 깨우치기 어렵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논어ㆍ양화陽貨》).”고 하였다. 공자의 편협한 여성관을 물려받은 유학자 집단이, 남녀를 모아 놓고 양성평등과 ‘자유연애’를 말하는 탁오의 강론을 곱게 보아줄 리 없다. 그들의 눈에 비친 탁오는 ‘사이비 교주’에 다름 아니었다.

이지는 결벽증이 있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었으며, 주변을 늘 쓸고 닦아 청결하게 하였다. 64세에《분서(焚書)》가 간행됐다.《분서》는 그가 주고받은 편지와 토론 및 문답한 글을 모은 책이다. 이지는 서문에서, 왜 ‘분서’라 하였는지 밝혔다.

“…그 속에서 논한 내용 가운데는 근래 학자들의 고질, 즉 결정적 병폐를 깊이 파고들어 자극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워버리려는 것이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태워버리는 것이 좋겠다. …(신용철 저,《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 159쪽 재인용)”

증오를 불러일으킬 내용이 있으므로 불태워버리라고 하였지만, 내심 탁오는 이 책이 길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목숨을 걸면서까지 책을 발간하려 했겠는가.

1598년~1599년에 북경과 남경을 방문하였다. 73세 때인 1599년, 68권 분량에 이르는 대작,《장서(藏書)》가 출간됐다. 이 책은 전국 시대부터 원대 말까지 800명에 달하는 인물을 <세기> 9권, <열전> 59권으로 분류하여 다뤘다. 독자적인 시각에서 역사적 인물을 재단하였다. 진시황을 천고의 유일한 황제라 하였다.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용인술이 뛰어났으며, 정치적 수완이 비상한 인물로 치켜세웠다. 사마천의 의협심을 극찬하였다.

1600년에《양명 선생 연보》,《양명 선생 도학초(陽明先生道學?)》를 편찬하였다. 같은 해 겨울, 다시 마성 용담호로 돌아왔다. 호광첨사(湖廣僉事) 풍응경(馮應京)이 풍속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폭도들을 시켜 지불원에 불을 지르자, 하남성 상성현(商城縣) 황벽(?檗)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지불원에 둥지를 튼 지 15년 만의 일이다.

1601년 관직을 박탈당해 평민신분이 된 마경륜(馬經綸)이, 이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그곳까지 달려가, 북경외곽 통주(通州, 현 북경시 통주구)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로 탁오를 모셔왔다. 마경륜은 친구 마력산(馬歷山)의 아들이었다. 그곳에서 체포되기까지 1년 정도 머물렀다.

25세 아래인 마경륜은 평소 이탁오를 흠모하였다. 마경륜은 탁오와 함께《주역》을 공부하였다. 1602년 특무조직, 금의위(錦衣衛)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탁오는 ‘혹세무민죄’로 체포돼 옥에 갇혔다. 석 달이 지나도록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어느 날 머리를 깎으러 감옥 안으로 들어온 시종의 면도를 빼앗아 목에 그어 절명하였다. 그의 나이 76세 때의 일이다.《명 신종만력실록(明神宗萬曆實錄)》에는, 단죄가 두려워 굶어 죽었다고 기술하였다.

이탁오는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공맹ㆍ주희 추종자’들과 무모한 한판 승부를 벌였는가? 유학자 그룹이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세태를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칼끝은 우상화한 공자, 신성불가침의 공자를 겨누었다.

“공자 또한 공자를 배우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공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공자를 배우는 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반드시 공자를 배울 대상으로 여긴다면, 필시 공자라도 정말 우습다고 여길 것입니다(옌리에산ㆍ주젠궈(?烈山ㆍ朱健國) 저, 홍승직 역,《이탁오 평전》,143쪽).”

원래, 공자는 상갓집 개처럼 열국(列國)을 떠돌면서도 권세에 빌붙지 않았고, 재물에 초연하였으며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교육에 힘썼다. 이탁오는 ‘인간 공자’를 존중하였다. 다만, 공자를 팔아 먹고사는 유학자ㆍ사대부ㆍ관료집단을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탁오는 유학자들의 행태에 넌더리를 쳤다. “겉으로는 도학을 합네 하며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하고, 학문이 깊은 척하고 우아한 복장을 하였으되, 하는 행실은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위의 평전, 245쪽).”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재상들마저도 탁오의 눈에는 ‘노예’로 비쳤다. 환관에게 아첨하고 굴종하는 재상들을 ‘환관의 노예’라 꼬집었다. 탁오처럼 대담하게 실권자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공공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흔히 “장수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고, 충신은 간언하다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탁오가 본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관념은 당시의 통념에서 벗어났다. 파격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의리는 본디 마음에서 생긴다. 군주가 신하를 초개처럼 대하면 신하도 군주를 도적이나 원수 보 듯해도 불의라고 책망하면 안 된다. 군신 사이는 정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뻔히 알고도 간언하다 죽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무도한 군주가 일찍이 언제 한 번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한 적이 없는데, 그의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이탁오,《초담집 初潭集》,권24 <치신痴臣>, 위의 평전, 242쪽 재인용).”

당시의 상식으로 볼 때 불경스럽다 못해 반역에 가까운 ‘독설’이었다.

이탁오의 무모한 죽음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았다. 이탁오는 과연 누가 죽였는가? 그를 비방하고 박해했던 유학자 그룹도, 그를 탄핵한 장문달(張問達, 예부에 속한 정7품의 간관諫官)도, 그를 가두라고 명령한 신종(神宗) 주익균(朱翊鈞)도 아니었다. 이탁오는 천성이 부여한 기질대로 살았고, 책에서 깨우친 대로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다 갔다. 마음껏 읽고 마음껏 쓰고 마음껏 외치다 지쳐서 그 스스로 죽은 것이다.

탁오 선생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권중달 역》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레이 황(黃仁宇, 1918~2000)은 그의 대표작,《만력 15년(萬曆十五年 *1587년)》에서 이탁오의 비극적 종말을 두고 이렇게 탄식하였다.

“이탁오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비극이다. 시대가 이성에서 발로된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면, 그 개인은 하나의 ‘관목(灌木)’이 될 수는 있으나 ‘숲(叢林)’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가 죽은 뒤 300 여 년 뒤에 5ㆍ4 신문화운동이 일어났다. 진사 출신 혁명가이자 초대 교육부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천두슈ㆍ루쉰ㆍ후스 등은 하나같이 “공자타도! 사상의 자유!”를 외쳤다. 유교 경전을 내던졌고 전국적으로 시행하던 공자제례 행사도 폐지하였다. 진흙에 묻혔던 진옥(眞玉), 탁오 선생도 이들과 더불어 다시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1974년, 비림비공(批林批孔 *임표와 공자 비판) 운동이 전개되자, 탁오 선생은 ‘중국 제일의 사상범’에서 다시 ‘사상 해방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탁오라는 이름 세 글자는 아직은 너무도 생소하다. 한국에서 이탁오의 생애와 활동을 다룬 번역서, 단행본이 출간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2005년에 홍승직이 번역한《이탁오 평전》이 빛을 보았다. 뒤 이어 2006년 초, 신용철이 지은《이탁오》가 출간됐다. 아울러 이탁오의 대표작의 하나인《분서》가 2004년 김혜경에 의해 완역됐다. 이탁오의 ‘겸용병포(兼容幷包, 모든 사상을 포용)’의 정신을 배우고 이해하는 기본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구만 리 장공으로 날아간 ‘봉황’ 탁오는 비록 ‘까막까치’, ‘참새’ 떼에 몰려 비명에 갔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풍요로웠다. 대다수 사람들은 ‘감투의 노예’, ‘재물의 노예’, ‘명예의 노예’로 살다 회한(悔恨)만 가득 품은 채 짧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빵의 노예’들을 준엄하게 꾸짖은, ‘책의 노예(탁오 자신의 표현)’ 이탁오 선생에게 우리는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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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