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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처럼 찾아온 쌍둥이 … 수술대에서 빼앗긴 내 꿈

월례 면회 1950~60년대 소록도 병원은 한센인이 낳은 자녀를 한센인 거주지역과 분리된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시킨 뒤 한 달에 한 번 경계선 도로 양편에 서서 면회를 하도록 했다.
[소록도병원 홈페이지]

내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진 건 1945년 봄이었어. 우리 6남매가 아버지와 저녁밥상 앞에 앉았을 때였지. 목수였던 아버지는 내게 숟가락을 다시 쥐여준 다음 묵묵히 밥그릇을 비웠어. 새벽녘 어머니의 흐느낌이 들려왔어.

 “우리 아버지도 그랬는데…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깊은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이 없었어. 그때부터였어. 손가락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눈썹이 떨어지기 시작했지. 내가 지나갈 때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어. “문둥이.” 그 단어가 나를 가리킨다는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그 무렵이었어.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를 떠나 외할아버지가 계신 소록도에 들어간 건.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황톳길 끝 바다 건너에 그곳이 있었지.

 그해 8월 해방이 되고 소록도에서 나와 줄곧 외할아버지와 살았어. 5년 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모님이 계신 집을 다시 찾았어. 아버지 눈빛이 서늘했어. 그 길로 동네 구장(區長)에게 이끌려 트럭에 올랐어. 광주 송정리에 도착하니 350여 명의 한센인이 모여 있었지. 보름 뒤 전남 고흥군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그곳, 소록도에 다시 들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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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살배기 아이에게 외할아버지도 없는 그곳은 너무 외롭고 무서웠어.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과 발이 없는 어른들. 빈대와 벼룩은 성치 않은 몸을 사정없이 물어뜯었고…. 전쟁 통이라 먹을 것도 없었지. 보리 농사를 거들었지만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들었어. ‘독신사’에 머물며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삶을 이어나갔어.

 그러기를 7년. 옆집 할머니가 중매를 섰어. 같은 마을에 사는 한센인이었지. 나이 차이가 열 살 넘게 났지만 살기 위해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했어. 남들처럼 아이도 갖고 싶었어. 하지만 소록도 병원은 일제 때부터 결혼하려는 남성 한센인들에게 ‘단종수술(정관수술)’을 시행하고 있었어. 자녀에게 유전돼 전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지.

 병원에서는 젊은 여성 한센인을 매달 검진했어. 임신 사실을 들키면 외지로 도망가든지, 낙태를 해야 했어. 병원 측의 서슬이 퍼렜지만 몰래 아이를 가지기로 했어. 나를 버린 가족을 잊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었어. 남편이 단종수술을 받기 사흘 전 동침을 했고 기적처럼 임신이 됐어.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며 행복했어. 검진시기가 오면 숨었고 외출할 땐 배를 꽁꽁 동여매고 다녔지. 그런데 넉 달 뒤 병원에서 눈치를 챈 것 같았어. 육지로 나가 아이를 낳기로 했어.

 58년 4월의 어느 날 저녁. 바닷가는 파도마저 종적을 감춘 듯 고요했어. 들에 나간 사람도, 바다에 갔던 사람도 집에 돌아와 있을 시간. 인적이 드문 때를 틈타 배를 기다렸어. 녹동항이 어슴푸레 보이는 바다 건너에서 배 한 척이 다가왔어.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있던 그때 순찰대원 2명이 달려왔어. 손을 뻗어 배에 오르려는 순간 머리채를 잡혔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넘어졌지. 신발이 벗겨진 채로 수십 분 거리의 소록도 병원 치료본관으로 끌려갔어.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을까. 수술대의 싸늘한 감촉에 깨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 생명이 자라고 있던 자리엔 묵직한 통증만 남아 있었지. “쌍둥이야.” 간호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수술실을 나서더군.

 그 후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 아쉬움이 평생 내 가슴을 떠나지 않았지. 이후 남편은 간척사업에 동원돼 몸 곳곳을 다쳐서 돌아왔어. 진절머리가 난 우린 64년 한센인 정착촌인 익산농원으로 거주지를 옮겼어. 남편은 2011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쌍둥이 얘기를 꺼내곤 했지.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고 반년 후 변호사들이 찾아왔어. “국가가 한센인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낙태·단종 수술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하려고 합니다. 유전으로 전염될 가능성이 없는데도 기본권을 박탈한 불법행위에 지금이라도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한센인 650명이 네 차례로 나눠 소송을 냈어. 기대가 컸지만 지지부진하기만 했지. 첫 판결은 지난해 4월 광주지법이었고,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3부에서도 3년 만에 판결이 나왔어. 나를 포함한 낙태 피해자 12명에게 4000만원씩, 단종 피해자 171명에게 3000만원씩 배상하라고.

 내 나이, 이제 일흔여섯. 국가가 항소하면 대법원 판결까지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빼앗긴 내 꿈을 확인받고 싶은데…. 육신을 벗고 천국에 가면 거기선 내 꿈,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박민제 기자


◆한센인 낙태 피해 여성 남모씨, 한센인권변호인단 박영립 변호사와의 심층인터뷰, 법원 판결문, 한센인피해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종합해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소록도병원의 낙태·단종정책=일제강점기 때 시행됐던 낙태·단종정책이 해방 후 1949년 다시 시작돼 92년까지 1807명에 대해 단종수술이 시행됐다. 낙태수술의 경우 공식 집계는 없으나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 낙태 피해자는 328명. 당시 ‘거세 수술자에 한해 부부생활을 인정하며 이를 위반한 자는 처벌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정부에서도 ‘출산 억제 ’ 지침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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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