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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볕의 안락함, 마음 한 구석의 애잔함





WITH 樂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

겨우내 얼었던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지났다. 한강에 여의도가 있고 부산에 을숙도가 있다면 대동강에는 능라도가 있다. 능수버들이 아름다워서 능라도다. 조금 더 기다리면 강물 위로 연두빛이 하늘거릴 것이다. 물론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 TV 속 능라도는 대형 경기장으로만 기억된다. 앞으로도 ‘별루연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하던 대동강을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능수버들을 바라보며 평양냉면 한 그릇 먹어 줘야 할 텐데 말이다.



대동강 얼음 녹는 소식은 확인할 길 없지만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는 봄은 느껴진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서울에 살 때 체감하지 못했던 진실과 마주친다. 봄은 언제나 남쪽 바다를 건너서 온다는 사실 말이다. 봄이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면 봄이 오는 소리에 살짝 귀를 기울여도 좋을 것 같다. 홍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 활짝 열린 창문으로 탁탁탁 이불 터는 소리, 바쁘게 움직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힘쓰는 소리, 새 학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분주한 소리. 주민세 고지서 날리듯 방송국마다 틀어대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나 비발디의 ‘사계’도 빠질 수 없다.



내 경우 봄은 고양이보다 클라리넷이다. 흑단 나무의 검은 빛과 은빛의 밸브들부터 매혹적이다. 클라리넷은 목관악기 중에서 음역이 넓은 편이다. 설레는 봄의 밝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서늘함도 표현할 줄 아는 악기다. 넓은 음역과 표현력 덕분에 클라리넷은 클래식뿐 아니라 재즈 연주자들에게도 사랑받았다. 베니 굿맷, 버디 디 프랑코, 에이커 빌크, 지미 주프리, 켄 펩프로스키 등등. 클래식 연주자들은 하나하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더욱 쟁쟁하다.



유명한 클라리넷 곡들은 많다. 그 중 클라리넷 역사에 남을 만한 백미는 모차르트에게서 나왔다. ‘클라리넷 오중주’와 영화에도 종종 쓰이는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다. 두 곡은 자주 커플링 된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명곡인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 b단조’와 커플링 된다. 모차르트의 오중주는 당대의 유명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틀러와의 친분 덕분에 만들어졌다. 슈타틀러는 F조의 베이스 호른을 개량한 독창적인 바셋 클라리넷을 사용하여 이 곡을 연주했다. 저음 보강형 주문 악기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대부분 연주자들은 A장조로 편곡된 악보를 썼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원전악기에 대한 연구와 복원노력 덕분에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에 바셋 클라리넷 연주가 재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굳이 원전에 집착하거나, 오디션 심사위원처럼 1등 뽑으려고 고민하지만 않는다면 둘 사이의 차이를 즐기면 그뿐이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오중주’에 관한 한 전설의 명연이 있다. 1951년 녹음된 레오폴드 블라흐와 빈 콘체르트하우스 콰르텟의 연주다. 이 곡이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이 음반은 계속 발매될 것 같다. 음반의 역사가 100년이 넘다 보니 일회적 시간예술인 음악을 사진 이미지처럼 포획한 연주가 독자적인 아우라를 갖는 경우가 있다. 푸르트뱅글러, 부다페스트 콰르텟, 글렌 굴드의 음반들이 그렇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 녹음에 있어서 블라흐의 음반이 차지하는 위상도 그와 같다. 전후 연주들은 시대적 우울 때문인지 현대 연주에 비해 템포가 느리다. 블라흐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2악장 라르게토는 8분 30초가량이다. 다른 연주자들보다 1~2분이 길다.



모차르트의 느린 악장을 '슬픔'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사전적 정의에 포박당하고 만다. 화창한 봄날 마루에 앉아서 햇볕을 맞고 있을 때 드는 안락함과 마음 한 구석에 느껴지는 애잔함이 공존한다. 무심한 일상 속을 뚫고 들어오는 감사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생의 비애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이쿠 작가 부손(蕪村) 은 잡을 수 없는 순간의 비애, 삶의 멜랑콜리를 이렇게 표현 해냈다. “꿈이련 듯 살며시 쥐어 본 나비로구나.” 블라흐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선율에는 유영하는 봄날의 나비가 남긴 아련함이 있다. 고풍스러운 연주에 몸을 맡긴 채 언젠가는 기억으로만 남을 지상의 한 때를 흘려보내도 좋을 성 싶다.



블라흐의 연주와 함께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음반은 영국의 클라리넷 연주자 테아 킹의 것이다. 1악장 클라리넷 도입부부터 바셋 클라리넷의 풍성함이 느껴진다. 헤르만 아베르트가 이 곡에 대해 말했던 ‘맑게 갠 봄날 아침’을 느끼려면 테아 킹의 클라리넷처럼 은빛과 나무향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녀의 클라리넷에서는 감귤향이 난다. 풍성한 소리지만 청량하고 정갈하다. 실용적이고 담백한 영국 레이블에서 영국인들이 함께 만든 연주여서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좋은 연주이다. 방송에 소개된 맛집은 맛이 없을 때가 많지만, 귀명창들이 꼽는 음반은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음반은 개인적으로는 봄 바다를 바라보며 많이 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울산 동해남부선 기차 안에서,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광안리에서, 잠시 귀에 꽂은 음악으로 사람들과 절연하고 봄날의 서정과 마주했었다. 혹시 다가오는 봄, 남쪽의 바다를 여행할 기회가 있는 분들은 이 음반을 가방에 넣어 오시길 바란다. 음악의 즐거움 중에는 음악적 경험을 공유하는 즐거움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엄상준 KNN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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