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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난 철들지 않는 노년을 꿈꾼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나이 올해 마흔일곱이다. JTBC 보도국의 ‘최고령’ 여기자다. 20대 초반 신참 기자 시절엔 취재원들이 혹 얕잡아 볼까 싶어 “서른”이라 둘러대곤 했다. 하지만 진짜 서른이 됐을 땐 만 나이에 미국식 나이까지 동원해 스물아홉을 오래오래 고수했고, 40줄에 접어든 뒤엔 아예 나이를 잊고 살다시피 했다. 잊은 척한 게 아니라 실제로 몇 살인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편의적인 기억력은 그렇게 정신 건강에 좋은 쪽으로만 작동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와 적잖은 나이를 굳이 밝히고 나선 이유는 뭘까. 마흔 이후의 삶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서른한 살에 요절해버린 천재 문필가 전혜린의 책들을 읽으며 “그래, 서른이 넘도록 산다는 건 이토록 견딜 수 없는 고통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렸던 열서넛 무렵의 나. 그때 그 생각이 틀려도 한참 틀렸다는 걸 새록새록 깨우치게 된 거다.

 더욱이 그저 ‘살 만한’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점점 더 행복해질 거라는데 나이 먹는 게 뭐 대수일까. 뜬금없는 소리가 아니다. 이 문제를 파고든 숱한 학자들의 주장이다. 사람들이 삶에 대해 느끼는 만족도는 10대 후반부터 내림세로 접어들어 46~50세쯤 바닥을 친 뒤 내내 상승 곡선을 탄다는 얘기다. 이른바 ‘U자형 행복곡선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는? 놀라지 마시라. 꽃다운 10대도 20대도 아닌 80대 언저리란다.

 팔자 편한 부자 나라나 그렇지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악이라는 한국에서도 그럴까. 돈이나 질병, 자녀의 유무 같은 외형적 조건보다는 내면의 변화가 행복을 좌우한다는 연구 결과가 답이 될지 모르겠다. 아무리 큰 슬픔이나 분노와 직면해도 너끈히 삭여낼 성숙한 마음가짐을 세월과 함께 갖추게 된다는 거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영 아니다 싶다고? 그럼 이런 설명은 또 어떤가. 죽음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질수록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먼 미래보단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살게 되니 자연히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 말이다(로라 칼스텐슨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내일보다 오늘에 충실한 게 행복의 비결이라면 여든 살까지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마흔일곱인 나야 최악의 시기라는 바닥도 얼추 찍은 듯하니 U자 곡선의 상승선을 앞질러 오르면 될 게 아닌가. 인생을 일곱 단계로 나눠 동물에 빗댄 『탈무드』 속 비유를 보면 사람은 당나귀(장년)와 개(중년)를 거쳐 원숭이(노년)가 된다고 한다. 철없는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아이처럼 사소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다 보면 노년의 행복을 앞당겨 누릴 수도 있을 터다.

 ‘나이 들면 보라색 옷을 입을 거예요/ 거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모자를 쓸 거구요/ …젊었을 때 조신하게 산 걸 만회해볼래요/ 슬리퍼만 신은 채 빗속을 노닐고/ 남의 집 정원에 핀 꽃을 꺾을 거예요/ 침 뱉는 법도 한번 배워보렵니다…’

 영국인들의 애송시 중 하나라는 ‘경고’(Warning·제니 조셉 작) 속 구절이다. 실제로 해외에 나갔다가 보라색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쓴 은발의 여성들을 떼로 마주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빨간 모자 협회’ 회원들이다. 원래 50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연령 제한이 없어졌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인생을 즐기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된단다.

 평소 “철이 안 드는 게 동안의 비결”이라고 자랑하는 지인이 있다. 자기 말마따나 종종 철부지처럼 느껴지는 그 분은 예순을 넘긴 사람답지 않게 늘 젊고 유쾌해 보인다. “나잇값 못한다” 소리를 좀 듣긴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행복도가 팍팍 올라간다는데.

 나 역시 철 들지 않는 노년을 꿈꾼다. 그러자면 미리미리 예습이 필요하다. 하나 마나 한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막대사탕 한 개에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 뛰던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끄집어내는 거다. 내친김에 빨간색 모자부터 하나 장만하고…. 내 나이 얼마 안 있으면 쉰이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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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