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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제3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송석진(57)씨는 이곳에서 ‘신(神)의 손’으로 통한다. 못 고치는 게 없다고 여기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얼마 전엔 고장 난 채 방치돼 있던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를 직접 고쳤다. 일일이 분해해 다시 조립했다. 자동차용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설계를 담당했던 송씨는 지금 필리핀 제2의 도시 다바오에 있는 한국·필리핀 직업훈련원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은퇴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낸 3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우울증에 빠져 한때 자살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한다. 무엇보다 할 일이 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힘으로 남을 도울 수 있으니 그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씨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이 파견하는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지난해 5월 필리핀에 왔다. 기계 분야에서 자신이 가진 노하우와 기술, 경험을 필리핀 젊은이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그가 맡은 임무다.

 ‘제3기(期) 인생(The Third Age)’이란 개념을 체계화한 것은 영국의 인구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이다. 1989년 출간한 『인생의 새로운 지도:제3기 인생의 출현』이란 책에서다. 라슬렛은 인간의 삶을 4기로 구분한다. 태어나서 취업할 때까지가 제1기, 취업해서 퇴직할 때까지가 제2기다. 퇴직해서 건강할 때까지가 제3기이고, 건강을 잃고 죽을 때까지가 제4기다. 라슬렛은 제3기야말로 개인적 성취의 시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기 인생은 불가피하게 떠맡게 되거나 목적의식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대로 계획을 세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시기는 사실상 제3기뿐이란 것이다.

 코이카 홍보전문위원 자격으로 지난 일주일 남짓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코이카 사업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자카르타에서 반둥, 마닐라에서 다바오까지 가는 곳마다 제3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월드 프렌즈 코리아(WFK)’란 이름을 달고 개발도상국에서 활동하는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이 되는 데 연령 제한은 없다.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오히려 나이가 우대 요건이 되기도 한다. 만 50세 이상 지원자 가운데 해당 직종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은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분류돼 일반 봉사단원에게 지급하는 주거비와 생활비의 1.5~2배를 받는다.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 시기와 맞물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제3기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현재 46개국에 파견돼 있는 1823명의 봉사단원 중 406명이 시니어 단원이다.

 송씨와 같은 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황성진(62)씨는 육군 대령 출신이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육사 동기(31기)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동기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데 동기들이 나를 가장 부러워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필리핀에서 제3기 인생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매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매사추세츠공대(MIT)로 통하는 반둥공대(ITB)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이선희(58)씨는 포항여고 국어 교사 출신이다. 그는 3년의 우즈베키스탄 봉사 활동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무대를 옮겨 WFK 단원으로 뛰고 있다. 은행 지점장 출신인 서형수(58)씨는 은행원 시절 자신의 주특기였던 정보기술(IT) 능력을 살려 마닐라 인근 카비테주(州)에 위치한 한국·필리핀 친선병원의 전산망 구축 작업을 도맡아 하고 있다.

 세계적 장수과학자인 박상철(서울대 의대) 교수의 캐치프레이즈는 ‘당당한 노화(老化)’다. 정년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사회적 생산 주체로서 자존감과 자긍심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받는 문화에서 주는 문화로 노인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자가 ‘하자, 주자, 배우자’는 세 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고령화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노화혁명:고령화 충격의 해법』)

 100세인이 많은 세계적 장수촌 4곳을 직접 취재해 『블루존』이란 책을 쓴 작가 댄 부에트너에 따르면 블루존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은퇴란 개념 없이 평생 일하는 점이라고 한다. 나이 들었다고 편히 쉬는 것이 아니라 요리하고, 청소하고, 증손자들 돌보고, 정원을 가꾸는 등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별도로 운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제3기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바오(필리핀)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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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